서기70년, 유대는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으로 파국을 맞았다. 그런데도 기독교계에서는 로마인들의 폭정과 박해로 유대가 멸망한 것처럼 둘러대고 있다. 하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로마인들의 박해와 폭정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서기70년 이후, 80~90년대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에도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로마인들의 박해로 유대가 멸망했다는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종파분자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겼다는 기사가 성경 구석구석에 있다.
‘이 자(바울)는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였다.(사도행전24;3~8). 베드로는 민심을 어지럽힌 자로, 매질을 당했으며 감옥에서 탈옥한 전력이 있다. 그러니까 유대 멸망이라는 ‘대 사건’을 놓고 보았을 때, 바울과 베드로는 멸망의 주체, 내지 동조 세력이었다. ‘큰 환난’에 무작정 덤벼든 불나방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런 환난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며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마태복음24;21)
‘그 날들은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의 창조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가복음13;19)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누가복음21;23~24),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요한복음16;3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로마서5;3~4)
이처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은 존재하지 않는 환난을 상상하면서 요란을 떨다가 서기70년 소원을 성취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군의 주적은 시리아 국경선 너머 파르티아였다. 유대인들의 소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폭정이나 박해를 가하지 않았다. 네로 황제의 실정으로 정국이 불안했다. 그 때문에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은 정예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시리아 총독은 로마 군단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코르불로(AD60~63), 갈루스(AD63~67), 무키아누스(AD67~69) 세 사람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용맹스러운 사령관들이었다. 코르불로는 도미티우스 씨족의 코르불로 가문 출신이었다. 기원전3세기 후반부터 서기 6세기 중반까지 가장 뛰어난 15명의 사령관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처럼 전략에 뛰어났고 부하를 아끼는 지휘관이었다.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문제로 마찰을 빚었던 파르티아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한 다음,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를 보좌하고 있었다. 젊은 장교들이 비밀리에 황제로 추대하려다가 밀고자가 있어서 실패하고, 코르불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AD63).
갈루스는 코르불로의 수석 참모였다. 상관이 로마로 돌아가고, 사령관을 이어받았다. 서기66년 10월 중순경, 유대총독 폴로루스가 도움을 요청했다. 갈루스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동 중에 병을 얻어 투병 중에 있었다. 이 때, 아그립바2세가 달려가서, 자기가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말했다. 갈루스는 아그립바2세에게 맡기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무키아누스는 갈루스의 수석 참모였다. 서기67년 갈루스가 병으로 죽고, 시리아 총독과 군단 지휘권을 계승했다. 그 무렵, 베스파시아누스가 지금의 터키 남부 오론테스 강 동쪽에 위치한 안디옥에 병력을 주둔 시키고 시리아로 달려갔다.
출신성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은 시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3인방이었던 나르키소스의 눈에 들어 로마군 지휘관이 되었다. 브리타니아 침공에 참가해서 선봉대장으로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20개가 넘는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AD43). 그때 무키아누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급 장교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정관을 역임했다(AD51). 그러나 나르키소스가 자살(AD54)한 다음부터,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다. 양봉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다가 페트로니우스의 추천으로 다시 아프리카 총독으로 갔다(AD63). 서기 66년 가을, 로마로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수행원으로 그리스로 갔다. 황제의 음악 공연 중에 잠시 졸았다. 이 모습을 본 네로가 자기를 무시했다면서 죽이려고 했다.
페트로니우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죽음을 모면했다.
“오르페우스는 노래로 맹수를 잠들게 했다지만, 보시다시피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한 폐하의 실력 또한 그에 못지않습니다.”
네로 황제는 서기64년부터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경우처럼 네로는 사람을 알아볼 줄 몰랐다. 국정도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측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렇게 되니까 변방의 사령관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서기67년 2월,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 병력을 할당받고 사령관이 되었다. 7월 병력을 이끌고 안디옥으로 갔다. 무키아누스가 시리아 주둔 군단 사령관이 되었음을 알고 찾아갔던 것이다.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모종의 약속을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황실 농장 책임자는 필로의 동생이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이집트 총독을 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들 부자를 포섭하여, 수확한 곡물을 로마로 운송하지 못하게 했다. 그 바람에 네로에 대한 로마 시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티투스와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제위에 오르게 하려고 일을 꾸미고 있었다. 네로 집권 말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령관 중에서 제일 먼저 도전장을 낸 사람은 이스파니아 총독 갈바였다. 그런데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근위대 병사들은 더 이상 황제를 지켜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겁에 질린 네로는 6월9일, 수도 로마 인근 은신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AD68).
네로가 죽고, 73세 고령의 갈바가 로마에 와서 제위에 올랐다(AD69). 그해 겨울, 내전을 원치 않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티투스를 축하 사절로 보냈다. 티투스가 로마로 가던 중 코린트에서 갈바의 살해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갈바는 원로원이 자기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에 오기 무섭게 정적들을 처형했다. 그런 다음, 후계자를 정할 때, 근위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토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지명했다. 제위에 오르고 7개월이 되는 1월 15일 오토가 갈바를 살해했다.
1월 16일, 새 황제가 된 오토는 경쟁 상대였던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 싸워야 했다.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로마를 향해 오고 있는 사이에 오토가 갈바를 살해했던 것이다. 그 당시 37세였던 오토는 자기 휘하 병사들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했다. 그러나 부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후광으로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비텔리우스(54세)를 당할 수 없었다. 오토는 전세가 불리하자 4월 16일 자살했다. 황제가 되고 3개월만의 일이었다.
원로원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승인했다. 그런데도 두어 달이 지난 6월 말경에야 수도 로마에 왔다. 이집트에 있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의식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조용하니까, 제위에 올랐다. 황제가 된 후, 그는 날마다 파티를 열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네로 때문에 파탄 난 황실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황제 옹립의 일등공신이었던 카이키나의 불신을 사게 되었고, 휘하 장병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정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티투스와 무키아누스는 7월1일(AD69),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무키아누스가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10월24일 베드리아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필로의 조카 ‘알렉산더’와 요세푸스,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도 참전했다.
비텔리우스는 전세가 불리하자, 제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런데도 근위대 병사들과 로마시민이 황궁으로 몰려가 결박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조롱하다가 12월20일 살해하고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렸다.
그런 일이 있기 며칠 전,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사비누스가 소수 근위대 병력을 이끌고 카피톨리오 언덕의 주피터 신전을 점령하려다가 비텔리우스 쪽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는 네로황제 시절 근위대 대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형의 죽음을 뒤늦게 알고 베스파시아누스는 비통해 했다.
12월21일,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승인했다(AD69). 그런데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오지 않고 열 달이 지난 서기70년 10월 로마에 왔다. 그 열 달 동안, 무키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원로원이 보상하게 했다. 그곳 비텔리우스 지지자들의 반역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무키아누스는 신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원로원을 소집하고, ‘황제 법’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내란 진압과 갈리아 반란을 사전에 차단한 무키아누스는 자신의 전과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열 달 동안 이집트에 있으면서 바닥난 황실 재정 복구에 주력했다. 황실 소유 토지 일부를 팔고, 유대와 그리스 부자들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였다. 이때 필로와 황실 농장 책임자였던 동생의 역할이 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알렉산더’를 근위대 대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유대인들을 신뢰했다.
이처럼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재정 확보에 주력하는 동안, 무키아누스는 로마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티투스는 파르티아 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리아에 있던 티투스는 부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옹립에 정신이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인들을 신뢰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핍박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독교계에서는 티투스의 박해로 유대 반군이 봉기했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 계시록과 같은 허무맹랑한 환란 이야기를 성경에 포함시켜, 계속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다. 참으로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로마인들의 박해로 유대가 멸망했다는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다가 종파분자들이 사회혼란을 부추겼다는 기사가 성경 구석구석에 있다."
설득력이 있어보이네요.
토머스 제퍼슨이 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설득을 통해서,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서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