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40년 5월 말부터 41년 2월 초순 사이에, 예루살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 총독 피소가 도착하기 전까지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선전하면서 민회 복고주의자들에게 시위를 하라고 부추겼다. 피소가 법정에 출두하던 날, 그를 에워싸고 있던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무죄로 풀려나더라도 우리들 손에서 도망칠 수 없다.”
피소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법정에 섰다는 자체만으로도 치욕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차하게 결백을 주장하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로원은 자살한 피소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했다면서 법정 모독죄를 적용하여 기록말살이라는 판결을 내렸다(AD20). 이로써 민회 복고주의자들을 선동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던 아그리피나 계획은 무산 되고 말았다.
티베리우스는 69세(AD27)에 카프리 섬으로 들어갔다. 5년이 지난 74세(AD32)에 나와서 캄파니아 지역 나폴리 만의 미세눔 곶에서 살았다. 황후와 아그리피나 흔적이 남아 있는 로마에는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국정을 차질 없이 운영했다.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AD33),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을 때(AD35), 외교에 능한 비텔리우스를 현지로 보내 신속하게 대응하면서 최고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거듭해서 말하거니와 티베리우스는 로마제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모범적인 통치자였다. 하지만, 근위대를 시가지에 불러들여 민회 복고주의자들의 기세를 원천 봉쇄했기 때문에 로마시민들은 티베리우스를 미워하면서 죽기만을 기다렸다.
서기37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추모 행사가 군단 병영에서 있었다. 행사에 참석한 티베리우스는 병사들 앞에서 창던지기 시범을 보이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79세였다.
근위대장 마크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서둘러 티베리우스의 사망 사실을 로마의 원로원에 알렸다. 집정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달려와서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발표하고 근위대 병사들로 하여금 시신을 운구케 했다.
3월 18일, 근위대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면서 운구 행렬은 포로 로마노 광장의 카이사르 신전 앞에 당도했다. 그때까지도 원로원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운구 행렬은 평화의 제단에 잠시 멈추었다가 별다른 의식 없이 마르스 광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신을 화장한 다음, 황제 묘역에 유골을 안장했다.
이 모든 행사를 집정관과 회계감사관 세네카 그리고 클라우디우스를 비롯하여 측근들이 주관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티베리우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후계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로마 거주 시민과 근위대 병사들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 씩 주라는 내용뿐이었다. 군단 병사 한 사람 연봉이 900세스테르티우스이고, 남자 노예 몸값이 200세스테르티우스, 노동자 석 달 품삯이 300세스테르티우스인 점을 감안할 때 거금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살아생전 다섯 번 유증금을 주었다. 티베리우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심을 썼다.
티베리우스는 금융위기 이후, 오늘날과 같은 은행을 개설하고, 대출을 해주면서 차용증을 받았다. 이자를 받지 않았지만 원금을 회수했다. 사망한 황후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켰다. 이처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면서 인색했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장례식이 진행 되던 그 시각, 원로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칼리굴라에게 모든 권한을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칼리굴라가 수락 연설을 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중단시켰던 신전 공사를 재개하고, 검투사 시합과 같은 볼거리 제공 등 ‘빵과 서커스’ 정치를 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탄성을 지르면서 기뻐했다. 25세가 되려면 다섯 달이나 부족한 젊은이가 생각 없이 한 말을 가지고, 대견스럽게 여기면서 좋아했다.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르고 다섯 달이 되던 8월 31일, 수도 로마는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칼리굴라의 생일 축하 행사와 아우구스투스 신전 봉헌식을 함께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자신의 우상화를 위하여 건물을 새로 짓게 했는데, 마무리 단계에서 티베리우스가 중지시켰던 것이다.
칼리굴라는 신전 준공과 함께 자신의 대관식을 함께 하려고 했다. 극동 지역 왕처럼, 금관을 쓰고, 금으로 수놓은 예복을 입으려고 했다. 원로원에서는 금관 대신, 칼리굴라의 목에 붉은 색 리본을 걸어주면서 매듭을 앞으로 오게 했다.
9월 27일(AD37), 원로원에서는 칼리굴라에게 ‘국가의 아버지’와 ‘신격’ 칭호를 선포했다. 그러자 칼리굴라는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유피테르 신상을 만들게 했다. 그 후, 로마에서는 날마다 축제 분위기였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면서 여자와 아이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거리를 뛰어다녔다. 모두가 행복한 얼굴이었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 것처럼 기뻐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축사절단을 인솔하고 온, 유대인 필로가 칼리굴라 앞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 행복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문을 활짝 열고 행복을 맞이하면 됩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칼리굴라는 날마다 연회를 베풀면서 흥청망청 돈을 쓰다가 10월 말경, 중병에 걸렸다(AD38).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제국 전체가 황제의 쾌유를 비는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너나할 것 없이 황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칼리굴라의 얼굴이 들어 있는 신상 앞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얌니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황제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달려가 소란을 피우면서 방해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얌니아 사건을 알게 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보복성 공격을 가했다. 유대인 소유 선박을 비롯하여, 주택과 상가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했다. 그곳 회당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웠다. 그리스 지도자 아피온이 이집트 총독 아빌라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자행한 일이었다(AD39).
그러자 필로가 다음 해 3월 대표단을 데리고 로마로 왔다(AD40). 그는 그리스인들로부터 입은 피해보상과 회당에 세워진 신상 철거를 탄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아피온이 사람을 보내 모함했다.
“유대인들은 황제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도시마다 유피테르 신상을 세울 때 그들은 동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사지내는 것을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칼리굴라는 자기를 신으로 대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괘씸하게 여겼다. 그래서 필로를 만나주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한 필로가 돌아가면서 말했다.
“황제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분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자.”
아무리 심기가 불편하더라도 함부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칼리굴라가 이 말을 전해 듣기라도 한다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근위대 병사들을 거느리고 갈리아 지역을 둘러보고 돌아 온 칼리굴라는 필로가 한 말을 전해 들었다. 5월 말경, 유대총독 헤레니무스 카피토에게 공문을 보냈다.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신상을 세우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유대인들이 신상을 세우지 않겠다면서 결사 항쟁을 선언했다. 칼리굴라는 총독을 소환하고, 다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신상을 유대인들 스스로가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도록 명령하시오. 만일 불복하거든 무력을 써서라도 그렇게 하시오.”
페트로니우스는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신상을 세울 수 없다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지중해 연안의 티루스(티레) 공방에서 신상을 만들게 했다. 그러자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나 민심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려 돌이키지 말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라, 이때 큰 환란이 있겠음이니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재앙을 선포한다는 예언자들은 신상이 세워지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마치 세상 종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요란을 떨었다.
빌립이 죽고(AD34), 공석 중이던 유대 북부 지역을 칼리굴라로부터 하사 받은 아그립비가 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서, 자기가 칼리굴라를 설득하면 신상 건립을 취소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칼리굴라와 아그립바 사이가 각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페트로니우스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아그립바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되레 페트로니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들 선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소. 총독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유대인들 호의를 선택했다면, 나에 대한 도전이요. 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소. 당신 스스로 인생의 결말을 짓기 바라오. 잘 가시오.”
그런 다음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에게 신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플라쿠스는 알렉산드리아 회당에 신상을 세운 전력이 있는 자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신상 건립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렇게 되니까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은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멸망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 무렵부터 칼리굴라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에게는 신적 능력이 있다. 세상이 너무 평온해서 따분하다. 군대의 궤멸, 기아, 전염병, 화재, 지진 등 온갖 재앙이 발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흥청망청 황실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채를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황실 가재도구와 패물을 경매에 붙여 경비를 충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처럼 칼리굴라의 행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근위대장 가이우스 카이레나는 괴로워했다.
직속상관이었던 게르마니쿠스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칼리굴라에게 쏟은 애정이 어린 심성을 그르쳤다면서 후해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치는 축제가 열리던 1월 24일(AD41), 경기를 관람하고 황제 일행이 점심을 먹기 위하여 황궁으로 가는 통로에서, 근위대장 카이레나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게르마니쿠스여! 용서하소서.”
그렇게 말한 다음, 칼을 빼들고 칼리굴라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자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앞에 있던 부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도 칼리굴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뒤이어 비틀거리는 칼리굴라에게 카이레나가 다시금 칼을 내리쳤다.
칼리굴라를 죽인 근위대장은 곧바로 클라우디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고, 자기를 황제 살해범으로 원로원에 고발하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떠밀리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29세 칼리굴라가 살해되던 날, 50세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올랐다.
칼리굴라 시신은 에스퀼리노 언덕의 정원 한 구석에 매장되었다. 그 누구도 황제 묘역에 안장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국익 최우선 정책을 펴겠다는 포부를 말하지 않았다. 근위대가 무력으로 옹립한 모양새였기 때문에 번거로운 절차 따위는 필요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전령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플라쿠스 총독에게 신상 건립을 취소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했다. 신상이 세워지기 직전이었던 2월10일, 플라쿠스 총독은 황급히 이집트로 돌아갔다. 이로써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질 뻔 했던 유피테르 신상은 유대인들 손에 박살이 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를 정식 왕으로 책봉하고, 유대를 총독 체제에서 선린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서기40년 5월 말부터 41년 2월 초순 사이에 신상을 건립하려다가 해프닝으로 끝난 사건이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 있다.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복음24;3~21).
이처럼 황당무계한 이야기와 예수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나는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이익이 된다고 보시는가요.
그렇지만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재앙을 선포한 예언자’들이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울도 ‘재앙을 선포한 예언자’에 속합니다.
‘재앙을 선포한 예언자’들은 환난(患難)을 선전하면서 위기감을 조성한 과대망상증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작정 불빛(환난)에 달려든 불나방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