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

부처님 오셨네.2

03-10-20 법현 1,931
부처님 오셨네.
황홀한 미소 부처님 오셨네.

부처님 우리곁에 계시네
부처는 누구인가?

“부처란 누구입니까?”
“깨달은 사람입니다.”
“무엇을 깨달은 사람입니까?”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부처란 어떤 사람입니까?”
“부처란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부처란 당신과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당신에게 ‘가장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세상 그 무엇도 당신을 괴롭힐 수 없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당신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당신 이외의 그 누구도 당신의 행복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본래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당신은 부처입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욕망과 아집이 당신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수행이란 본래 부처인 나를 밝혀가는 길입니다. 부처란 세상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세상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본래 행복한 사람, 바로 당신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그것이 현세이든 내생이든, 복을 빌면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재물이나 명예가 생기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증거 삼아 누가 복 주는 힘이 더 큰지 비교·경쟁하거나 자랑하기도 합니다.
어떤 신통한 현상이 있으면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그 현상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괴로움이 없는 인생,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이 복입니다. 그것이 어떤 힘있는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주어진다면, 나의 인생은 그 무엇인가에 종속됩니다.
부처님은 최고의 복을 부처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부처되는 삶이란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되는 길입니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복을 자기가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복 많이 받으세요.” 하지 않고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합니다.
재물 얻기를 바라는 생활에서 재물을 줄 수 있는 생활로, 이해받고자 하는 삶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삶으로 바뀔 때 당신의 인생은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번 초파일을 만나서 등불을 사루고 복을 많이 지으시기 바랍니다. 부처되는 복을 지으십시오.
부처님이 오신 땅 인도, 당시 대중의 삶

지금으로부터 2625년 전, 뒤로는 천 년 한설을 두른 세계 최고봉 히말라야 산맥이 감싸고, 앞으로는 설산 녹은 물이 모여 갠지스 강으로 도도히 흐르는 곳. 북인도 카필라성과 천비성의 중간 지점에 있는 룸비니 동산에서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이 아기가 이후 인류에게 진리의 등불을 밝혀준 부처님입니다.
인도는 혹한과 폭염이 공존하는 기후, 정글과 사막이 양립하는 지형이 병존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따뜻한 온기와 풍부한 수량으로 풍요를 주는가 하면, 작열하는 태양과 폭력적인 홍수·가뭄·질병으로 잔혹한 고통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정신문명을 꽃피웠던 곳이면서, 가장 철저하고 잔인한 계급질서가 존재했던 곳입니다. 지금도 핵폭탄을 만드는 첨단 과학과 경제력이 있는가 하면, 신분적 차별로 짐승보다 못한 천민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부처님 탄생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세상을 바라문 신이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는 자신의 머리·허리·무릎·발바닥에서 각각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 즉 사제·왕족·평민·노예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머리에서 만든 사제는 정신적으로 평민을 다스리고, 허리에서 나온 왕족은 힘으로 평민을 지배하고, 무릎에서 만든 평민은 바쁘게 노동하여 사제와 왕족을 먹여 살리고, 발바닥에서 나온 노예는 더러움도 마다하지 않고 불평 없이 위를 보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사성제도입니다.
이 인간관은 아직도 인도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중들의 삶은 계급 차별과 왕의 횡포, 잦은 전쟁으로 인한 징병과 수탈, 권력과 부의 편중이 부르는 빈익빈 부익부, 물신숭배와 쾌락만능이 주는 윤리의식의 상실과 가치관 혼란 등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대중 삶의 현주소였습니다.
또한 사제의 타락과 쾌락에 대한 거부감, 왕족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 탐욕의 노예가 된 거부들에 대한 비난, 계급차별로 인해 천대받는 어리석음에 대한 환멸, 태어나는 것조차 괴로운 천민의 삶, 이것들과 연관되어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중들은 이것을 각각 천상·아수라·축생·아귀·지옥·인간의 세계로 나누어 육도윤회(六道輪廻)의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육도윤회의 현실을 고해(苦海), 이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고해를 벗어나 자기 자신과 사회 전체가 해탈에 이르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과 그 의미

부처님의 탄생 장면이 경전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카필라성과 천비성 중간에 ‘룸비니’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동산이 있었다. 이 동산에는 아쇼카 나무(無憂樹)가 우거져 있었다. 카필라성의 왕비 마하 마야는 해산하려고 친정인 천비성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 여러 나무들은 줄기에서 가지 끝까지 꽃을 피웠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새들이 지저귀면서 날아다녔다. 왕비는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에서 잠시 쉬고 싶었다. 왕비는 가마에서 내려 숲에서 가장 웅장한 아쇼카나무 아래 이르렀다. 왕비가 꽃이 활짝 핀 가지를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손이 꽃가지에 닿자 왕비는 곧 산기(産氣)를 느꼈다. 시중들은 곧 왕비의 주위에 포장을 치고 그 자리에서 물러갔다. 마야 왕비는 룸비니 동산에 산실이 마련되자, 아쇼카나무 꽃가지를 잡고 선 채 오른쪽 옆구리로 옥동자를 낳았다. 아기는 탄생하자마자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 스스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수레바퀴 같은 연꽃 송이가 피어올라 발을 받쳐 주었다. 일곱 걸음씩 걷고 나서 사방과 상하를 둘러본 아기는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가리키며 사자처럼 외쳤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 속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그 아기가 석가족 카필라성의 새로운 왕자 ‘싯다르타’였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설화는 부처님의 전 생애를 축약적으로 보여주는 약도입니다. 부처님은 계급사회였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옆구리에서 낳는 왕족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왕자로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모두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출가했습니다.
많은 스승에게서 그 길을 배우고자 했으나 얻지 못하고, 스스로 육도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증득하여 부처가 되었습니다.
부처님 깨달음의 핵심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자신은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나 많은 생명이 고통 속에 있음을 보고, 고통받는 중생들을 평안에 이르게 하고자 전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후 열반에 드실 때까지 거리의 대중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괴로움을 없애주고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옆구리에서 태어나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육도윤회를 벗어난 일곱 발자국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를 선언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인도에서는 ‘이 세상’을 신의 세계인 ‘천상’과 인간 세계인 ‘천하’로 구분합니다. 천상의 신은 신통력이나 기적으로, 천하의 인간은 권력과 재물로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욕망 추구를 가치중심에 두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상대를 미워하고 저주한다면, 천상의 신이든 천하의 인간이든 그것은 중생입니다.
당신은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깁니까? 우리는 가치를 판단할 때 상대적인 비교를 합니다. 잘났다·못났다, 크다·작다, 부자다·가난하다 등등. 모든 것은 ‘누구보다’ 혹은 ‘무엇보다’ 혹은 ‘내 욕망보다’라는 비교로 정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재물·능력·외모·학력 등을 나의 조건과 비교해 보고, 상대보다 우월하면 행복해하고 열등하면 불행해합니다.
자신이 처한 조건이 욕망대로 되면 행복하고, 되지 않으면 괴롭습니다. 나의 기대와 비교해서 못 미칠 때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학하거나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나는 나 자신을 돈보다 못한 인생, 학벌보다 못한 인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 남이 그렇게 만듭니까? 당신 스스로의 욕망이 그렇게 만듭니까? 당신 인생을 돈 얼마와 바꿀 수 있습니까? 어떤 학력과 바꿀 수 있습니까? 당신 인생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말씀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오로지 내가 홀로 존귀하다. 다른 무엇과 비교해서 존귀한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혼자 있어도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신의 신통력과 권능이 지배하는 천상의 세계, 왕의 권력과 재물과 명예와 쾌락이 지배하는 천하의 세계, 나는 천상천하에서 비교를 떠나 홀로 존귀하다는 인간해방의 선언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당신 인생의 행복을 남에게 기대하고 집착하여 맡겨버릴 때, 당신의 인생은 그의 것이 됩니다. 상대에 의해서 당신의 행복이 좌우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부처입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부처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선언입니다.
부처님의 문제의식

어린 왕자 싯다르타는 12살에 농사짓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전에 없던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농부와 밭가는 소, 땅속의 벌레와 벌레를 쪼아먹는 새, 힘들게 살아가는 농부와 풍요로운 왕의 관계, ‘왜 함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어린 싯다르타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노예가 늙거나 병들면 길에 버렸습니다. 버려진 노예는 살아있을 때까지는 비참하게 걸식하며 생명을 부지하다가, 죽으면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채 썩어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청년기를 보낸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의 문제의식이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고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싯다르타는 왕자의 신분으로 노예와 평민의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재물을 나눠주거나 노예를 해방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풍요롭고 권력있는 왕족들도 근본적인 괴로움은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 괴로움의 해결이 계급 철폐나 경제조건 변화만으로, 혹은 위로나 동정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많은 학자와 사제들에게 배워서 해결하려 했으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왕위가 대중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왕자의 신분이 대중들의 고통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출가하였습니다.
싯다르타는 현실을 도피하려고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중과 유리되었던 편안한 삶에서, 고통받는 대중의 삶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중의 괴로움을 직접 느끼고, 그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대중의 삶에 동참했습니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숲에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들어와서 걸식하며, 그들의 고통스런 삶과 함께했습니다.
부처님은 불효자가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가족의 이익만을 위한 행동이 효자라면, 부처님은 분명 불효자입니다. 자기 가족만의 이익을 위한 가족이기주의는 종종 이 사회의 경제와 정치와 교육을 망치곤 합니다. 이 사회의 부정부패와 타락상, 그리고 환경오염은 바로 이 가족이기주의와 지연·학연 등의 집단이기주의가 빚어낸 것입니다.
한 재벌기업의 아들이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자기 가족의 이익을 위해 쓰지 않고, 직원들의 복지사업과 불우이웃돕기에 썼을 때, 그를 못된 불효자라고 한다면 부처님을 불효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가족이기주의는 조금만 넓게 보거나 장기적으로 보면 자기 가족조차 불행하게 만듭니다.
부패 관료나 포르노 사업가, 환경오염 주범들의 행태를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부처님의 성도와 열반

지금으로부터 2625년 전 음력 4월 8일에 태어난 싯다르타는 29세 되던 해 음력 2월 8일 출가하여 해탈의 길을 찾았습니다. 6년이 지나서 싯다르타가 35세가 되던 해 음력 12월 8일, 네이란자나 강이 흐르는 가야 땅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 샛별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은 온 세상의 원리와 인생의 근본을 밝히셨습니다. 그 깨달은 내용의 핵심이 바로 ‘천상 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부처님은 이후 고통받는 중생들을 해탈케 하려고 평생을 돌아다녔 습니다. 넝마로 기운 가사 한 벌과 발우 하나를 들고, 중생의 괴로움이 있는 곳이면 직접 달려가서, 그들의 사연을 듣고 괴로움을 씻어주었습니다.
이후 80세에 쿠시나가라성 사라수 나무 아래에서 음력 2월 15일 열반에 드실 때까지, 평생을 거리 대중들과 함께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때에 한 비구가 부처님께 사뢰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지금까지는 부처님을 따르고 공양을 올림으로써 복을 얻었습니다. 이제 부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 누구를 따르고 공양을 올려야 복을 얻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부처의 진실은 이 육체가 아니라 진리의 가르침이니라. 나는 비록 떠나지만 진리의 가르침[法]은 남아 있느니라.
이 진리를 따라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최상의 복이 될 것이니라. 수행자들이여,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법을 잘 받아서 깊고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고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법과 계율에 따라 올바로 행하면, 그것을 일러 여래를 참으로 공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네 가지 인연이 있어서 그대들에게 복을 얻게 할 것이니, 이 네 가지에 공양을 올리거라. 무엇이 그 네 가지 인연인가?
첫째는 중생들이 굶주려 있으면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여 목숨을 잇게 하라. 둘째는 중생들이 병들어 고통받고 있으면 그들을 보살피고 공양하여 편안하게 하여 주거라. 셋째는 가난하고 고독한 자가 있으면 그들과 함께하고 공양하며 보호하여 주거라. 넷째는 청정하게 수행을 하는 이가 있으면 그를 위하여 옷과 밥을 공양하고 보호하여 주어야 할 것이니라. 이 네 가지 법이 있으면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부처님이 계시는 것과 다름이 없느니라.”

부처님 오신 날 왜 연등불을 밝히나?
초파일이 되면 등불을 밝힙니다. 등불은 어리석음을 밝히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어둔 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등불은 길을 밝혀주는 생명의 불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누군가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괴롭습니다.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히면 눈에 뵈는 게 없어져서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것처럼,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 때 당신은 중생입니다.
당신이 가진 재산보다 당신이, 당신의 외모보다 당신이, 당신의 주장보다 당신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당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때 당신은 부처입니다. 당신 가족을 볼 때, 그의 재산과 명예와 학벌과 외모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지면, 당신 가정은 극락정토가 됩니다. 당신과 가족과 이웃을 이렇게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당신이 그 소중함을 잃을 때 당신은 중생입니다. 그 소중함을 깨달을 때 당신은 부처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돌아보기 위해 등불을 밝힙니다.
그러면 초파일에 왜 하필이면 연꽃으로 단장한 등불을 밝힐까요?
연꽃은 지저분한 진흙탕에서 자라고, 고인 물에서 피어납니다. 그러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면서 주변도 아름답고 화사하게 합니다.
연꽃이 진흙탕을 싫어해서 깨끗한 모래땅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으로 간다면 그 연꽃은 곧 죽습니다. 연꽃이 진흙탕을 피하지 않고 깊이 뿌리박을 때 중심이 서고, 더러움과 탁함을 외면하지 않을 때 당당하게 떠올라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마치 연꽃처럼 욕망과 분노로 괴로워하는 세상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괴로움을 끌어안고 함께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원을 세운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연꽃을 불교의 상징화로 삼았고,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관불의식(灌佛儀式)
관불의식(灌佛儀式)은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의식(儀式)으로,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 동산을 상징하는 화단을 만들어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그 가운데 부처님의 탄생 조각상(한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가락은 땅 을 가리키는 동자상)을 안치한 뒤 작은 표주박으로 감로수를 떠서 부처님의 정수리에 붓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욕불(浴佛)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님을 목욕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옛부터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하는 의미로 행해져 왔던 관불의식은 불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사람들 불교와 인연을 맺어 속세의 때를 씻고, 깨끗하고 맑은 생활을 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관불의식은 일찍이 인도에서부터 행해졌는데, 녹야원에 남아 있는 옛 조각품 중에 탄생불의 머리에 용왕이 향수를 붓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보요경(普曜經)》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셨을 때 제석천왕과 대범천왕이 갖가지 향수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아홉 용이 하늘에서 황태자의 몸에 향수를 뿌려 목욕한 아기 부처님은 심신이 청정해졌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에는 “부처님이 태어나자 천지가 크게 진동했으며, 모든 하늘 사람과 신들이 와서 시위를 했고, 두 용신이 덥고 찬 두 줄기의 물을 쏟아 내리어 몸을 씻겼다” 고 전하고 있습니다.
《관세불형상경(灌洗佛形像經)》에는 “4월 8일에 부처님을 목욕시키면 다생에 독기가 모두 소멸되고 만물이 다 잘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4월에 만물이 다시 생하고 독기(毒氣)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춥지도 덥지도 않아 시기적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설하여 있습니다.
한편 《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에는 관불을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관불게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래강생시(如來降生時)
구룡토수(九龍土水)
목욕전신(沐浴全身)
관욕금신(灌浴金身)
아금관욕동자불(我今灌浴童子佛)
정지공덕장엄취(正智功德莊嚴聚)
오탁중생명이구(五濁衆生命離垢)
당증여래정법신(當證如來淨法身)

여래께서 태어나실 때에
아홉 용이 물을 뿌려
금신을 목욕시켰으므로
저희들도 이 맑고 깨끗한 물로
금신을 목욕시켜 드립니다.

제가 이제 동자불을 목욕시키오니
바른 지혜 공덕을 모아
오탁중생들은 더러운 때를 씻고
여래의 깨끗한 법신을 증득케 하옵소서.

먼저 스님이나 법사님이 향로에 향을 꽂고 물을 떠서 부으면 신도들이 차례로 나아가면서 이 게송을 외우며 물을 붓는데, 옛날에는 이 물을 떠다 먹고 병이 나은 사람들이 있어 부처님 씻은 물은 한 방울도 버리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관불을 한 뒤에는 깨끗한 수건으로 부처님의 몸을 닦은 뒤 향을 피워 공양을 하고, 길상수(吉祥水 : 부처님 몸을 씻은 향수)로 동참한 대중의 머리를 적시어 일체의 번뇌를 씻어내고 오분법신의 성취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리고 길상수를 받은 대중은 인예(引禮)의 인도를 받아 관불대를 중심으로 해서 왼쪽으로 돌며, 세 번 또는 일곱 번 부처님께 예배를 올립니다.

불탑(佛塔) 예배의 공덕
탑은 범어로 스투파(stupa)라고 하며, 탑파(塔婆)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기 위하여 만든 건조물입니다. 흔히 돌이나 흙 등을 높이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는데, 나라와 시대에 따라 그 양식이 다릅니다.
탑을 세우게 된 유래는 부처님 열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 쿠시나가라 국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후 다비(화장)를 하였는데 8섬 4말의 사리가 나왔습니다. 그 때 여덟 나라에서 사리를 모시고 가 탑을 세우니, 그것이 부처님 진신사리탑의 시초입니다. 그 후 유명한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임금인 아쇼카 대왕이 인도 대륙을 통일하고, 7탑의 사리를 분쇄하여 8만4천 개의 불사리탑을 세우셨습니다.
사리란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나는 구슬 모양의 영골로서 지극한 계·정·혜 삼학과 한량없는 육바라밀의 수행으로 성취되는 심히 얻기 어려운 최상의 복전입니다. 그 얻기 어려운 사리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여덟 섬 너 말이나 출현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탑을 세우는 것일까요?
탑을 세우는 이유는 부처님의 훌륭함을 나타내고, 남을 믿게 하며, 은혜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불탑에 예배하는 것은 부처님께 직접 예배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합니다.
≪승기율≫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백천 근의 순금으로 보시를 행하여도 한 덩이 진흙을 갖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불탑 만드는 그것보다 못하느니라.”
비구들도 부처님께 예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사람들 모두 백천금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여도 한 선심으로 공경하면서 불탑에 예배하는 그것보다 못하네.”
비구들이 향과 꽃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과 과거 부처님의 불탑에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백천 수레 순금을 가지고 보시를 행하여도 한 선심의 향과 꽃을 탑에 공양하는 그것보다 못하느니라.”
이처럼 탑에 예배한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탑을 예배하는 방법에는 공양을 올리는 것도 있지만 탑돌이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찰에서는 대개 부처님 오신 날이나 큰 재(齋)가 있을 때 탑돌이를 합니다. 탑돌이를 하는 의미는 ≪현자오계경(賢者五戒經)≫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탑을 세 번 도는 것은 삼존(三尊)에의 공경을 표하는 것이니 삼존이란 첫째는 부처요, 둘째는 법이며, 셋째는 승이다. 또 삼독(三毒) 없애기를 생각하는 것이니, 삼독이란 첫째는 탐욕이요, 둘째는 성냄이요, 셋째는 어리석음이다. 또 삼천위의(三千威儀)에서 말하였다. 탑을 돌 때에는 다섯 가지 법이 있다. 머리를 숙여 땅을 보고, 벌레를 밟지 말며, 좌우로 돌아보지 말며, 탑 앞의 땅에 침을 뱉지 말며, 중간에 서서 남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탑돌이를 하는 공덕을 ≪제위경(提謂經)≫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탑을 돌면 다섯 가지 복덕이 있다. 첫째는 후생에 단정한 좋은 몸을 얻고, 둘째는 좋은 음성을 얻으며, 셋째는 천상에 나고, 넷째는 왕후(王侯)의 집에 나며, 다섯째는 열반의 도를 얻는 것이다. 무슨 인연으로 단정한 좋은 몸을 얻는가. 불상을 보고 기뻐하기 때문이다. 무슨 인연으로 좋은 음성을 얻는가. 탑을 돌고 경을 강설하기 때문이다. 무슨 인연으로 천상에 나는가. 탑을 돌 때에 마음으로 계를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인연으로 왕후의 집에 나는가. 머리를 땅에 대고 부처님 발에 예배하기 때문이다. 무슨 인연으로 열반의 도를 얻는가. 남은 복이 있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탑을 세우는 공덕과 함께 그 곳에 예배한 공덕 또한 크나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한 공경심을 갖고 청정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으로 탑을 돌려 할 때에는 원하여라,
중생들이 복을 항상 베풀고 도의 뜻을 끝까지 통하기를.
탑을 세 번 돌 때는 원하여라,
중생들이 한결같은 뜻을 얻고 삼독(三毒)을 길이 끊기를.”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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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10-21 바람
    스님의 좋은 말씀 항상 고맙습니다. 늘 마음에 새겨 제 스스로를 돌아보는 탑돌이를 해야할 듯 싶네요. 스님 내내 평안하시기를...
  • 03-10-21 원정
    그래요.
    저도 오직 저의 길을 걸어 갈랍니다.
    그 누구의 길도 아닌....
    석가모니의 길도 아니요, 예수의 길도 아닌.....
    오직 제 자신에만 의지하고, 돈이나 명예나 사상이나 기타 다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함이 없는 저의 길을 걸어 갈랍니다.
    의지하고 말 것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 03-10-23 바람 책과 어린양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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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0-14 바람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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