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은 기원전 73년경 이두메 지역에서 태어나 유대 왕위에 올랐다가 기원전 4년 사망한 인물입니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헤로디움에서 헤롯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서기 30~70년대 유대 역사물을 다루면서 <총독 빌라도>, <유대 왕 아그립바>, <예루살렘 최후의 날>, <소설 속의 예수> 외에도 <헤롯왕>의 기본 얼개를 잡아놓았습니다.
오늘은 <헤롯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시리아에 의하여 유대교 종교행위가 금지된 기원전 165년 이후, 유대는 마카베오 시대를 거처 요한 히루카누스 때에 이르러 크게 번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 야네누스가 죽고(BC76), 그의 부인 알렉산드라가 여자의 몸으로 유대를 통치해야 하는 시점에서 하스몬 왕조는 퇴조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장남 히루카누스가 바리새인들에게 휘둘려 대제사장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차남 아리스토불로가 갈릴리 토착세력을 등에 없고 왕 행세를 하고 있었으며, 때마침 극동 지역에 온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아리스토불로를 고발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스토불로는 제사장의 후손이긴 하지만 백성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 왕 행세를 합니다.”
히루카누스도 거들고 나섰습니다.
“제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불로가 대제사장 직을 빼앗으려합니다. 게다가 갈릴리 세력을 끌어들여 이 같은 짓을 합니다. 그가 폭력과 무질서의 장본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반역을 도모하겠습니까? 이 사실을 말해 줄 증인은 천명이 넘습니다. 제 말이 의심쩍으시면 안티파테르에게 물어보십시오.”
여기에서 천명의 증인은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며,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 안티파테르를 증인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증인으로 안티파테를 내세우게 된 사연이 궁금해서 알아본바 요한 히루카누스가 사마리아의 그리심 성전을 공격한 일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심 성전 방화사건 이후, 사마리아인들이 적개심을 보이자 남쪽지방 이두메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랍니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갈릴리의 아리스토불로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리스토불로는 갈릴리 패거리와 함께 와서는 심중에 있던 말을 죄다 했습니다.
“히루카누스가 장남이긴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백성으로부터 경멸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면서
“더구나 저기 모여 있는 자들의 사주를 받거나 안티파테르와 같은 이방인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유대가 언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근심하는 사람들이 저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게다가 왕 칭호는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스몬왕조가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자주색 옷에 화려한 장식품을 치렁치렁 걸치고 나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폼페이우스 장군은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화목 하라는 말만 남기고 나바테아로 떠났습니다.
그러자 아리스토불로는 폼페이우스 장군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준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갈릴리로 돌아가지 않고 모친과 히루카누스를 옥에 가두고 바리새인들 중 몇 명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바테아에서 돌아오는 장군을 마중 나가 500달란트 상당의 뇌물을 주면서 예루살렘에 들리지 않고 지나가도록 은근슬쩍 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장군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려 하자 성 안에 있던 자들이 성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아리스토불로는 포로 신세가 되고,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역사가들이 말하는 제1차 로마와 유대 전쟁사의 시작입니다.
폼페이우스 장군은 공성 망치와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서 한 순간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 안으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아리스토불로를 따라 왔던 갈릴리 패거리를 모두 죽여 버립니다.
이처럼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스몬 왕자들의 싸움과 자신들은 무관하다는 뜻에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장군은 본당에 들어가 다량의 금과 거룩한 등대와 고귀한 그릇과 향료, 그리고 2,000달란트에 달하는 돈을 보았으면서도 전리품으로 빼앗아 가지 않았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드리워 있던 거대한 휘장을 제치고 안을 들여다보고 아무도 없더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 안티파테르를 불러 유대 전권을 맡기고 거짓을 고한 아리스토불로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안티파테르에게 유대 전권을 맡긴 해가 기원전 63년이었으며, 기원전 43년 유대인 말라쿠스의 만찬에 초대를 받고 안티파테르가 독살을 당했으니 20여 년 동안 유대는 이방인의 통치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장성한 헤롯이 하스몬왕가의 공주 마리암메와 혼사를 맺었고, 안티파테르는 연로한 탓에 장남 바사엘을 예루살렘 총독에, 차남 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보냈으며 딸 살로메에게도 지중해 연안의 유대 남부 지역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전 지역을 안티파테르 일가가 나누어 가진 셈이랍니다.
그러나 모반을 꾀하는 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기 마련이고, 안티파테르가 독살을 당한 직후 헤롯이 이두메로 달려가 부친의 원수를 갚는 동안 갈릴리에서는 아리스토불로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에제키아 잔당과 힘을 합쳐 예루살렘 공략에 나섰습니다. 더구나 바사엘에 불만이 많았던 수구세력들이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바사엘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헤롯이 뒤늦게 달려와 전황을 바꾸어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동생 페로나스가 전사합니다. 헤롯은 하는 수 없이 이집트에 가서 재기의 기회를 노립니다.
헤롯이 이집트에 머물고 있는 동안 레온토폴리스 성전 쪽에서는 헤롯이 도망자의 신분인줄만 알았지 유대에 돌아가 왕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디아스포라의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이집트에 갔던 헤롯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찾아갑니다.
여왕은 흔쾌히 헤롯의 청을 들어 줍니다. 당시 로마 실세였던 마루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소개 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왕의 도움을 받게 된 헤롯은 이집트 여인을 후처로 맞이하면서 그녀의 이름을 클레오파트라라 했습니다. 여왕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감사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루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약속받고 유대로 돌아온 헤롯은 갈릴리 지역을 되찾는데 성공합니다. 이 때 토착세력 에제키아를 죽이고 갈릴리의 세포리에서 드라키아족, 가을족, 튜론족으로 편성된 3천의 용병을 모집한 다음 사마리아의 욥바에 진을 치고 예루살렘 공격에 나섭니다.
그러나 성벽이 원체 견고한데다가 병사들이 용병이라서 몸을 사리는 바람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시리아 총독 소시우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 공략에 성공합니다.
이때가 기원전 37년 7월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전 지역을 되찾은 헤롯은 현안 문제가 산적한 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일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하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누구를 대제사장에 임명해야 좋을 까였고, 또 다른 하나는 폼페이우스 장군이 보았다는 다량의 금과 2,000달란트를 건국에 필요한 재원으로 쓰기 위한 명분 찾기였습니다.
헤롯은 그 문제를 매우 현명한 방법으로 풀어나갔습니다.
헤롯은 수코스 축제 때 야훼께서 자신에게 명한 것을 직접 받는 의식을 주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헤롯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하스몬가문 사람 중에서 11세 소년을 대제사장에 임명했습니다. 소년을 대제사장에 임명한 사례를 역사적으로 찾아 볼 수 없거니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이전의 히브리인들 장막시절 대제사장은 대속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년을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헤롯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유월절 행사 때, 어린 대제사장을 보면서 백성이 환호하자 헤롯은 혼자서 희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연못에서 놀다가 빠져 죽는 바람에 헤롯이 죽였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됩니다.
다음에는 사독가문의 후손을 불러들여 대제사장 지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지위에 오른 사람이 이집트 레온토폴리스 성전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사독가문의 후손이긴 하나, 가난한 농사꾼을 불러왔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대제사장 자질 문제가 거론되면서 다시 이집트에서 보에뚜스의 시몬을 불러들입니다.
헤롯이 성전 금고의 돈을 시중에 풀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성전을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당시 성전은 기원전 500년경 스룹바벨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낡고 초라한 건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립하는 레온토폴리스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더 좋은 성전을 짓자고 하면 모두가 기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이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이두메 출신이고, 로마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빼앗았다고 보기 때문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그 자리에 다윗처럼 자신의 궁궐이라도 세우면 어쩌나 하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산과 마주 보이는 시온산 중턱에 하스몬 궁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의 아고라 지역에 궁궐을 또 짓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자금난에 허덕이며 아녀자들의 목걸이까지 벗어 공사비에 보탤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성전 쪽에서 건물을 헐고 다시 지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기원전 22년의 일이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은 성스러운 지역에 드나들 수 없으니 젊은 사제들로 하여금 목수나 석공 일을 배우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전담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여 역사학자 니콜라우스의 고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뜰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막는 바람에 건물이 완성 되었다고 기뻐할 즈음에 건물이 무너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합니다.
본시 가파른 지역에 성전을 세우려면 낮은 지역에서 석축을 올려 그 공간에 흙을 매립하기 마련이고, 그곳의 다짐이 시원치 않아 무너진 것입니다. 길이가 25, 높이가 8, 너비가 12규빗이나 되는 돌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보면, 부실한 기초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기 마련입니다.
무너진 건물을 헐어내고 기초를 단단히 다진 다음, 벽을 다시 쌓아 올리다 보니 1년 6개월이 지나서야 본당 건물이 완성되었습니다.
본당 건물 준공식을 치르던 해(BC 15)에 헤롯은 여인의 뜰에 무대를 설치하고 대관식을 함께 가졌습니다. 무대 옆에는 로마황제를 상징하는 독수리 석상도 세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그 누구도 불평할 수 없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경축 사절단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경축 사절단을 이끌고 온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위였으며 유명한 장수 마르쿠스 아그립바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내에 있는 판테온 신전을 설계한 사람이며, 집정관 재직 당시(BC25) 신전을 완성시켰습니다.
판테온 신전이라는 말 자체가 모든 신을 모시는 신전이라는 뜻이기도 하려니와 이에 걸맞게 건물 내부에는 하늘을 지배하는 제우스,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하는 아폴론, 출산과 어린아이의 발육을 관장하는 아르테미스, 전대를 차고 다니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자를 도와준다는 메르쿠리우스와 같은 신상을 안치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반구형으로 이루어진 천정 중심부를 개방하고 하늘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구조라서 밀실에 해당하는 예루살렘 성전과 비교될만한 건물이었습니다.
이런 신전을 설계한 사람이 경축사절로 왔으니, 그가 성전 본당 주변을 온통 성역화 한 가운데 당직 사제 외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든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헤롯의 업적 중에는 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토목, 건축 분야의 공사가 두드러지게 많았습니다. 자신의 궁궐과 성전 외에도 옛 바리스 탑을 헐어버리고 주거에 필요한 건물로 바꾸면서 수십 필의 말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마구간과 연못까지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시 몇 달이고 버틸 수 있는 대단한 요새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로마군을 위하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특별히 주문한 건물이기도 하려니와 그를 기억하기 위하여 안토니요새라 명명했습니다. 안토니요새 이외에도 경기장과 극장이 시가지에 들어섰습니다.
예루살렘 일대를 하늘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면, 성전산과 시온산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키드론, 티로퓌온, 힌놈골짜기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서쪽 힌놈 골짜기 상류에는 수량이 풍부하면서도 등고선이 성전 뜰보다 높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헤롯은 이 물을 성전까지 연결하는 수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터널을 뚫거나 평지에 수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원석을 쪼개고 면을 고른 다음 이음새 부분에 납을 녹여 붙이거나 석회 모르타르를 바르는 기술이 요구되는 공사였습니다.
축제 기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번제단에서는 매일 짐승을 도살하기 때문에 항시 물이 필요했습니다.
가축의 피와 내장이 바닥에 떨어지면 물을 뿌려 동쪽 키드론 골짜기로 흘러 보냈습니다.
그래서 놋바다라고 이름 붙여진 거대한 물탱크가 있었으며, 그곳에 몰을 채우기 위해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헤롯은 이 공사를 추진하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헤롯과 본부인 마리암메 사이에는 집안 내력에서 비롯된 원한이 남아 있었습니다. 허약한 장남 히루카누스에 대항하여 차남 아리스토불로가 왕권을 주장하고 있을 때 헤롯은 히루카누스 쪽 사람이었고, 마리암메는 아리스토불로 편을 들고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 장군이 안티파테르에게 유대 전권을 맡기고 아리스토불로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이미 한 바 있거니와 그가 말년에 쇠약한 몸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죽었습니다. 마리암메는 오라비의 죽음을 헤롯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에 심사가 꼬인 마리암메는 드러내놓고 대들다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음식을 거절하며 그곳에서 굶어죽었습니다. 이 때, 그녀의 모친 알렉산더는 거리에 뛰어나와 딸을 비난하면서 헤롯 편을 들었습니다.
그녀와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노환으로 고생할 당시(BC4) 마리암메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또 발생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아비가 아들을 죽음의 자리에 내줄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암메와 적대 관계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그녀의 소생이 왕권을 이어받지 못하게 미리 손을 썼을 것이라는 가정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헤롯과 바리새인들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왕자의 난 이후, 헤롯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바리새인들의 입지는 참으로 묘하게 발전했습니다. 예전부터 아고라 지역에서 집회를 열던 그들이 새 궁궐을 지으려는 헤롯에게 장소를 제공하면서 성전 회랑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칠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회랑은 복도 형태의 긴 건물로 한 쪽을 개방하고 다른 쪽은 막혀 있기 때문에 햇빛막이와 비를 피할 수 있거니와 작게 구획된 점포가 들어서도록 설계 돼 있어서 바리새인들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어 토론을 벌리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더구나 사제계급을 견제할 요량으로 헤롯은 그들에게 학문 연구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궁궐 출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궁궐내의 여인들과 노예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대단한 신분인양 위세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히루카누스 시절 6년에 걸쳐 국정을 좌지우지했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 시대, 그러니까 서기 41년에서 44년에 걸쳐 정치적 지지 세력이 없던 아그립바를 이용해 자기들 마음대로 국법을 바꾸고, 국호마저 바꾸려 했었습니다.
그들은 서민이면서도 학습이나 교리를 통해 사회적 지위 상승을 노리던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헤롯이 저들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아들을 죽게 한 이후였고, 독수리 사건이 불거진 다음이었습니다.
독수리 석상 사건은 누군가에 의하여 석상이 파괴되자 헤롯은 크게 분노했고, 잡혀온 범인은 율법학자 맛디아스 문하의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학생을 잘못 가르친 죄로 맛디아스와 또 다른 사람이 잡혀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맛디아스는 이렇게 항변했습니다.
‘모세가 야훼께 배우고 자신이 깨달은 그 율법을 우리가 존중하고, 모세가 써서 후손들에게 넘겨준 그 율법을 우리가 당신 명령보다 더 중요하게 준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당하겠으며, 당신이 우리에게 괴롭힐 수 있는 모든 형벌을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헤롯은 맛디아스와 또 다른 사람을 화형 시켰습니다.
얼마 후, 자신도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에제키아 후손에 대한 숨은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기 6년 에제키아의 아들 유다가 갈릴리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시리아 총독 바루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어린 아들 야고보와 시므온 형제는 갈릴리에서 계속 살고 있었습니다.
서기 47년, 야고보와 시므온 형제는 총독 디베리오 율라우스 알렉산더에게 잡혀 처형당합니다.
총독은 로마에 가서 출세한 헤롯의 후손입니다.
서기 70년 시카리당원들이 예루살렘 시가지 일부를 차지하면서 당시 시몬의 휘하에 있던 므나헴이란 자가 헤롯 궁전에 들어가 왕 의상을 빼앗아 입고 거들먹거리다가 동료들 칼에 맞아죽습니다.
그는 에제키아의 후손이며 야고보와 시므온의 사촌 되는 사람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