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한 종합대책 마련에 나섰다고 한다. 보건복지부ㆍ교육인적자원부ㆍ농림부ㆍ청소년위원회ㆍ기획예산처 등이 자살을 막기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침체와 빈부의 양극화로 자살이 사회문제로 등장했고, 유명 인사ㆍ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이 늘면서 모방 자살 가능성이 커지자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복지부가 마련한 자살 방지 아이디어 중에는 농약 농도를 낮추는 방안이 있고, 또 자살을 시도하다 다친 사람에게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라 한다. 교육부에서는 자살 방지 교육을 실시하고 우울증과 자살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집단 따돌림이나 학교 폭력 등 여러 요인을 예방차원에서 점검하려는 노력을 강화했다고도 한다.
평생을 자살 충동 한 번 없이 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살 충동은 편안할 때가 아닌 불편할 때, 그것도 극도로 불편할 때 인간이 느끼는 특수한 정서 상태이다. 요즘 대권주자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그의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자살 충동을 느껴 한강 다리 난간에서 몇 번씩 물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한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삶이 그다지 힘들지 않더라도 자살의 유혹이 강한 것 같다. 자살하는 사람의 80%가 우울증 상태라고 하니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하긴 그들은 이미 삶이 힘들어 우울증 상태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내가 최초로 자살 충동을 느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끼니를 굶는 것도 아니고 내가 경제를 책임져야하는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이런 궁핍한 삶이 평생 이어진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는, ‘그래, 이래저래 탈출할 방법이 없다면 자살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길일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정말 어느 날부터 죽을 작정으로 밥을 굶기 시작했다. 견딜 만 했으면 밀고나갔을지 모르겠는데 하루 반인가를 굶고는 배가 고파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 속으로는 걱정하는 식구들에게 죽으려고 굶는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철없던 막내의 그 시절을 지금 생각하니 나는 그 때 이미 심신이 피곤한 상태였다. 억척같이 의지를 불태워 삶의 돌파구를 찾아야 할 나이에 죽음을 선택하려 했다는 것이 이미 약해빠진 상태인 것이다. 굳이 그 원인을 찾자면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체한 것이 수개월 동안 영 내려가지를 않았고, 그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찾은 개인병원 의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단을 들어버린 등등이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이다.
“이 학생은 위에서 분비되어야 할 위산이 전혀 나오질 않습니다. 무산증입니다. 지금으로선 별 치료책이 없습니다. 과일 같은 걸 식사 후에 먹는 수밖엔 없습니다. 위는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위가 약해지면 그 주변의 장기들도 점차 약해질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는 ‘아, 치료책이 없어 시간이 가면 점점 모든 게 약해지고 결국 죽어가겠구나’라고 확대해서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의 힘은 참으로 강한 것이다. 한참 펄펄할 나이에 나는 ‘언제 죽게 될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그로부터 십 오륙년이 지나 대학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도 한 후 이번엔 종합병원을 찾았을 때는 의사가 누우라고 한 뒤 배 몇 군데를 손으로 꾹꾹 눌러보고는 ‘정상’이라고 했던 것이다.
한 때 나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오랜 시간을 속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격려하는 하루』라는 책을 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차나무가 우리에게 그토록 좋은 차를 선물하는 것은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 생명체는 얼마나 고된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친환경 농법인 태평농법을 개발하여 널리 보급하고 있는 이영문선생은 벼를 논에 심지 않고 밭에다 심으면 몇 배나 더 깊게 뿌리를 땅 속에 내린다고 한다. 물이 적으니 그 만큼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논에 심은 벼는 태풍이 지나가 쓰러진 후에는 일으켜 세워주어야 살지만 밭에 심은 벼는 세워주지 않아도 깊게 내린 뿌리로 인해 홀로 일어나 튼튼히 잘 자란다는 것이다. 땅에 물이 풍부해서는 어떤 식물이라도 깊이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의 말은 나를 메마른 땅으로 안내 한 셈이다.
『나를 격려하는 하루』는 위 글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려 향기로운 사람이고 싶습니다. 고단했던 하루가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됩니다.’
이처럼 생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지만 나는 삶이 고단할 때 그 고달픈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언가를 위한 목적이 미래에 있다면 그것은 또다시 내가 이루어야 할 새로운 관념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현재의 정서는 그 즉시 먼 미래를 위하여 감내해야 할 또는 없애버려야 할 부담스러운 대상으로 남는다.
현재의 이 고달픔이 미래에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그 순간 고달픈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이러한 고달픈 순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 현재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현재의 힘든 마음들이 그 즉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종류의 정서들에 대해서 자신이 현재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들게 될 것이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현재의 정서는 어떤 것이든 간에 바로 이 순간에 실현해야 할 목적으로 변한다. 예컨대 고달픔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의 목적이 되는 셈이다.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 순간에 그 목적을 이루고 있는 셈이 된다. 즉 고달픔을 이 순간 느끼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로 현재의 목적이자 동시에 그 목적을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순간에 자신의 목적을 바로 완성하고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완전성이 싹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