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이야기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 1장, 귀국(2)2

07-03-03 김춘봉 1,129
 (부제) 서기 40년대 예루살렘 이야기




1장, 귀국 - (1), (2)


2장, 왕과 총독


3장, 유피테르 신상


4장, 성전 수난사


5장, 재회


6장, 황제의 죽음


7장, 유대통일


8장, 에필로그





1장, 귀국


                                         (2)


  욥바항 부두에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블라스투스 주변의 사람들이야  헤롯궁전과 하스몬궁전의 식솔이려니 짐작이 갔지만, 또 다른 무리가 손을 흔들고 있으니 의외였다. 부인과 아이들을 앞세우고 배에서 내리는 동안 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여러 필의 말과 마차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 때서야 아겔라오와 안티바가 사마리아의 말타케 출신 여자 소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모친이 하스몬 가문 출신이라서 아그립바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뜻밖의 환대에 감격한 나머지 세바스테에서 잠시 머물기로 했다. 


  할아버지 헤롯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는 뜻에서 사마리아를 세바스테라 부르게 했다. 이는 영예로운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사마리아를 유대의 행정수도로 승격시키기 위한 조처였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의 자부심은 어느 유대인 못지않았다.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이동과 거주는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로마제정 이후 세계의 3대 도시로 꼽히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도 유대인 거주지가 형성 된 다음이라서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유대에 와서 살겠다고 했을 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가이샤라, 율리아스, 얌니아와 같은 도시가 이 때문에 생겨났다. 이처럼 발 빠른 대응을 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그나마 성도 특유의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바스테에서 며칠을 묵는 동안 갖가지 생각을 해 보았으나 좀처럼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예루살렘 실세들과 한 판 승부를 겨루어야 하는 마당에 이곳 사마리아인들은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런저런 구상을 하는 중에 그리스도교들이 다시금 생각났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볼 요량으로 말을 꺼내기 무섭게 장로는 이상하리만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경멸에 가까운 냉소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왜 그러십니까?”


“믿을 사람들이 못됩니다.”


“어째서요?”


“제가 대제사장 가야바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드나들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 총독 주선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화해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된 다음이라 왕래가 자유로운 시기였습니다. 그 때 갈릴리 출신 어느 젊은이도 일행과 함께 사마리아를 지나가게 된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니 두 지역 주민의 해묵은 감정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고, 그 때 젊은이는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요?”


“예루살렘에 가서도 비슷한 말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어느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싸매고 나귀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 부비가 더 들면 돌아갈 때 갚겠다고 했답니다.”


“… ”


“그런데 다음 말이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만약에 대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그 자리를 피해갔다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더 이상 장로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젊은이는 사람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섬겨야 할 대상이 따로 있다는 말 중에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했다면, 무슨 의도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 분명했다. 그러나 비유치고는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존경 받기를 좋아하는 대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사마리아인 보다 못한 존재로 비하하는 발언을 했으니 의도야 어떻든 감정을 살만한 내용이었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불만이나 적개심이 숨겨져 있는 어투였다. 그래서 이런 말이 불쑥 뛰어나왔다. 


“그를 만나게 해 주시요.”


“죽었습니다.”


“예!? … ”


죽었다는 데야 할 말이 없었다.


애석한 마음에   


“제자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들이 배신하는 바람에 죽었습니다.”


  그 순간, 현기증을 느끼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에야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할라치면 어지럼증부터 나타났다. 무언가 붙잡지 않고서는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곤 했다.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 마다 소심한 탓에 그러려니 여기면서도 이 때문에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근심해본 적도 있었다.


  아그립바가 이처럼 과민반응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배신행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로마에 유학할 당시, 아그립바는 안토니아 집에서 줄곧 살았다. 안토니아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 드루수스 부인이지만 차분한 성품에다가 자녀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쏟는 여인이라서 속주 왕이나 실력자들은 그녀에게 자녀를 맡기고 싶어 했다.


  아그립바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장성해서도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안토니아를 도우면서 그녀의 소개로 키프로스와 결혼을 했고, 세 자녀를 낳았다. 이런 와중에서 안토니아의 며느리가 되는 위프사니아 아그리피나가 국가반역죄로 폰티아 섬에 유배되고, 그녀의 셋째 아들 칼리굴라가 17세 나이로 할머니 안토니아를 찾아왔던 것이다.


  칼리굴라는 손위 형이나 누이와는 달리 부친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와 시리아 등지를 거치며 성장했기 때문에 의지할 곳은 할머니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아그립바는 38세였으며 칼리굴라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그립바는 헤롯의 혈통을 이어받은 장손임을 내세우면서 유대로 돌아가 왕 되기를 청했으나 황제로부터 거절당해 불만이 많았고, 칼리굴라 또한 아우구스투스와 게르마니쿠스에 이어 자신도 황제의 후계자임을 은연중 과시하는 가운데 모친과 형들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한 뒤라 두 사람은 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그립바는 이런 말을 하고야 말았다.      


“티베리우스 시대가 빨리 끝나고 자네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를 기도하고 있네. 무엇으로 보나 자네가 후계자야.”


  이 말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어린 손자 게멜루스를 후계자로 내정한 상태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때 유티쿠스가 옆에 있었다. 그 자는 아그립바가 부리는 해방노예였다.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 유티쿠스가 옷 몇 벌을 훔치다 발각되면서 주인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 유티쿠스는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앙심을 품고 미세눔에 달려가 황제에게 아그립바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을 했다.  


  졸지에 반역자로 몰리게 된 아그립바는 미세눔에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다.


대질 심문하는 자리에서, 


“고소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황제의 물음에 유티쿠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꾸며댔다. 


“늙은이가 빨리 죽고, 그대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 그자의 손자가 방해가 될 것이니 해치우세.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그립바는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말밖에 하지 못했다.


“제가 고인이 되신 황제의 아드님과 함께 교육 받은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게다가 저는 게멜루스를 가르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저 자는 도적의 주제에 잘못을 뉘우칠 생각은 하지 않고 거짓을 고합니다.”


이처럼 애원해 보았지만 황제는 아그립바를 감옥에 가두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안토니아가 황제를 찾아가 아그립바의 결백을 증명하려 했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는 게멜루스가 후계자임을 세상에 알릴 기회로 삼았다. 


  아그립바는 6개월 동안이나 감옥에 있다가 황제가 죽은 다음에야 풀려났다. 하마터면 티베리우스 손에 죽을 뻔했다.


  왕 칭호를 받게 된 이면에는 이처럼 배신과 그에 따르는 비애와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배신자 소리를 듣기만 해도 화가 치밀 만 했다. 


  사마리아 장로에 의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배신자임을 알게 된 아그립바는 그들의 힘을 빌려 보겠다던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증오했다.


“내가 저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계속)


 

 

 

  • 07-03-03 원정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전 제 게으름이 무척이나 부끄럽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시랴 밤에는 글을 쓰시랴...

    언제나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 07-03-04 김춘봉
    막노동하면서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었습니다.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에게 동기 부여를 해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졸음을 참아가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원정님,
    오늘 모처럼의 휴일을 맞이했습니다.
    만나서 한 잔 하십시다.
  • 22-11-30 google-김춘봉 미군정 49일 평양222
    22-11-26 김춘봉 장백산 코스, 백두산 관광232
    22-11-25 김춘봉 팔레비 공창제는 여죄수 재활 프로그램219
    22-11-24 김춘봉 <이슬람 혁명>을 목격한 한국인 근로자들223
    07-05-21 김춘봉 헤롯왕01,480
    07-03-07 김춘봉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 1장, 귀국(3)11,068
    07-03-03 김춘봉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 1장, 귀국(2)21,130
    07-02-23 김춘봉 (소설) 유대 왕 아그립바 - 1장.귀국(1)21,373
    07-01-08 김춘봉 페트로니우스에게 보내는 서한11,060
    06-12-30 김춘봉 칼리굴라 황제(2)21,081
    06-12-25 김춘봉 칼리굴라 황제(1)21,018
    06-12-18 김춘봉 유대인들과 부계사회21,198
    06-12-11 김춘봉 여자들의 증언과 대제사장 가야바01,036
    06-12-02 김춘봉 젊은이(예수)가 미리 본 세상2987
    06-11-30 김춘봉 대자연(大自然)8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