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노래에 대한 몇 가지 단상2

03-10-22 지구인 751
임재현/은하가족 - http://column.daum.net/galaxyfamily

저녁 무렵 대구역 지하철 역사를 지나오다가 우연히 노래에 열중하고 있는 가수를 발견하였다. 대구에서 역사 공연은 흔치 않는지라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가기만 할 뿐 필자처럼 유심히 보는 사람은 네 다섯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도 박수를 치는 사람도 필자 뿐, 나머지는 그냥 무덤덤... 역시 감정 표현에 서투른 경상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귀에 익은 가요와 팝송 위주로 부르던 두 사람은 끝곡으로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를 불렀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필자도 따라 불렀다. 물론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워낙 커서 필자의 노래 소리는 그 소리에 묻혔기 때문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 필자 중3 때로 기억한다. 당시 대학가요제 입상곡은 곧바로 전국민의 애창곡이 될 정도로 엠비씨 대학가요제는 명망높았던 무대였다. 대학가요제를 거쳐간 수많은 주옥같은 노래가 있었는바 특히 필자의 기억에 남는 노래가 바로 이 그대 떠난 빈들어 서서였다.

서강대 신방과에 다니던 두 대학생이 에밀레라는 이름으로 나와 불렀던 것으로 기억하는 이 노래는 작곡자의 말에 따르면 예수의 일생을 다룬 노래였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가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저 너머 빈 들에 울어 지친 소리는
내 텅 빈 가슴을 채우니
어느 하늘 밑 부드러운 손길 있어
그 소리 조용히 달랠까

나는 한 마리 날으는 새가 되어
그대 곁으로 날아 가리라
나는 한 마리 날으는 새가 되어
그대 곁으로 날아 가리라

그대 창 밖의 슬픔을 따다가
내 꿈 깊은 곳에 심어 두리라
그대 가슴 속 아픔을 따다가
내 꿈 깊은 곳에 심어 두리라

난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리
그대 가슴 속 한 마리 작은 새
되리라, 되리라, 우우~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중후한 남성 저음의 톤이었다. 직접 감상해 보시면 느끼시리라 믿지만 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의 바리톤에 가까운 에밀레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자 그러면 일단 노래부터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http://windbird.pe.kr/ko_geudaedeonanbindeuleseoseo_emr.htm

교회당에 가면 사람들이 수없이 모여앉아 복음성가를 부른다. 대학 다닐 때 교회다니는 여자후배한테 여자들이 교회당에 많이 가는 이유를 물으니 왈, 교회가서 노래부르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많이 갑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충분히 공감이 갔다. 필자가 읽은 책 중에 유럽의 수도사들이 그 힘든 수도원 생활을 버티는 이유는 그레고리안 챤트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스트레스 푸는 것을 떠나 사람은 노래, 보다 근원적으로는 소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흔히 귀먹은 것보다 앞못보는 게 더 답답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 반대다. 앞못보는 거는 처음은 답답하지만 살아가면서 그런대로 참을 수 있는데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정말로 참기 힘든 고통이라고 한다.

실제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날 때도 소리라는 매개를 통해 일어난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밖에 차가 다니는 소리, 먼데 개가 짖는 소리, 아버지가 틀어놓은 테레비 소리,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요리하는 소리, 누가 깨어나서 쿵쾅 거리며 화장실로 달려가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등등... 그리고 하루를 열심히 산 후 잠을 잘 때는 가능한 한 하루종일 열어두었던 오관의 창을 닫아 두어야 한다.

잠이라는 것은 소리를 들리지 않게 귀만 막는다고 잘 잘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빛이 들어오지 않게 눈만 가린다고 푹 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체는 소리 뿐 아니라 빛에도 민감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빛을 희미하게 하고 소리도 가늘게 들릴 정도로 해두는 것이 잠을 가장 잘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된다. 이렇듯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가 모두 소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을 정도로 소리는 우리의 삶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테레비를 많이 보는 아이보다 라디오를 많이 듣는 아이의 지능지수가 더 높고 창의성도 더 뛰어나다고 한다. 필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필자도 경험한 바이지만 라디오를 켜게 되면 소리만 나오게 된다. 예를 들어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때의 히트물이었던 전설따라 삼천리를 보자. 라디오판 전설의 고향이었던 그 프로를 들으면 문 여닫는 소리, 누가 나와서 말하는 소리, 그리고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 싸우는 소리, 등등 여러 소리가 나온다.

필자는 그런 여러 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이런 저런 상상을 많이 해보았다.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떠한 모습일까? 불여우는 어떤 모습으로 공중제비를 할까? 삐그덕 소리를 내는 문짝은 어떻게 생겼을까? 앞으로 열릴까 뒤로 열릴까? 라디오는 이처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창조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소리를 듣고 상상하게 되는 여기에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그에 반해 요즘 아이들은 비쥬얼에 빠져 있어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키울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것 같다. 사람은 청각보다는 시각에 더 예민하기 때문에 테레비 드라마를 보더라도 소리보다는 화면자체에 몰두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정신없이 화면만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프로가 끝나버리는 체험을 한번쯤은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쇼프로나 오락프로 같은 것이 그러하다. 히히덕 거리다 보면 어느 새 단순해지고 멍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테레비보고 바보상자라고 하는 것 아닌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이다. 테레비를 켜놓은 후 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화면만 볼 때와 화면은 가렸지만 소리는 켜놓고 있을 때의 느낌을 비교해 보라. 어느 쪽이 더 답답한가? 보이지 않을 때보다는 들리지 않을 때가 아닌가? 그러나 소리와 빛 둘다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말씀이 있어서 이 말씀이 우주를 빚어냈다고 한다. 현실 우주가 생기기 이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초시공적인 곳에서 신은 말씀으로 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기독교 경전의 이야기도 나름대로 일리는 있다고 본다. 그러니 이때의 말씀은 우주 폭발시의 소리와는 구별되는 소리이리라. 우주는 태초의 빅뱅시(요즘 들어서 빅뱅 이론은 통설로서의 자격을 잃어가고 있다) 엄청난 에너지가 사방으로 산화해갔다. 그러면서 빛과 소리가 동시에 시공간으로 퍼져나갔다. 천체물리학자들에 따르면 이 때 생겨난 소리는 수백억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흔적을 찾으면 우주가 생겨날 때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여튼 우주 태초의 소리는 억겁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무한히 다양한 소리로 나뉘어졌다. 온갖 짐승이 내는 소리, 물소리나 바람 소리, 비소리, 눈오는 소리, 사태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 풀과 나무와 꽃들이 속삭이는 소리, 모래위를 기어가는 사인드와인더 소리, 인간이 내는 온갖 소리... 노래 소리, 코고는 소리, 밥짓는 소리, 말소리, 고함치는 소리, 환호성 소리, 울부짖는 소리, 우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등등... 그 중에서 노래가락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식물도 노래를 부른다고 하고 동물들도 각기 그 특유한 멜로디를 낸다고 하지만 인간이 만든 노래처럼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을까? 거기다가 깊은 의미를 담고있는 노래말이 덧붙여진다면... 인간이 노래를 부르면 힘을 얻기도 하고 기운을 잃기도 하는 이유는 인간의 몸은 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노래가 내는 파동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복음성가를 부르면 몸과 마음이 절로 성스러워진다. 절에 가서 예불을 같이 드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수행할 때 만트라를 외는 것 또한 성가를 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래 만트라는 리쉬들 즉 성자들이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받아낸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만트라는 천상의 소리이자 신의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태을주 만트라 또한 신의 소리이다. 그래서 홀라이프 엑스포 같은데서 태을주를 읽으면 외국인들이 천사가 노래 부르는 것 같다고 하는 게 그냥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성자가 받아내린 신의 노래인 만트라가 아니더라도 만인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는바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도 그러한 노래다. 앞서 가사도 살펴보고 노래감상도 해보았으리라 믿고... 필자는 이 짧은 가사에 예수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커다란 감동과 경이를 느꼈다. - 이 노래가 어째서 예수의 생애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기로 한다. 여러분들이 각자 해석해보시라. - 물론 예수의 33년 전 인생이 아니라 3년 동안의 공생애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시에 매혹되는 이유도 같다. 압축의 미학, 운율의 미학... 한시에서도 칠언절구 같은 걸 보면 압운을 맞춰서 짓는데 여기에도 내용 뿐 아니라 소리에 대한 배려가 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소리와 빛이라는 것은 음양 세트로 나타날 때만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소리와 빛이라고 해도 악마주의자의 공연이나 헤비메탈의 공연, 그리고 음울한 가사와 멜로디로 이루어진 노래를 듣는것은 전혀 다른 효과를 준다.

그들 소리와 영상은 듣는 이의 영성을 좀먹고 파괴시킨다. 옛날 기차를 타고 가는데 두 아줌마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걸 엿듣게 되었다. 산장의 여인을 부른 그 누구야 그 여자 가수는 자기가 부른 노래 그대로 산에 들어가서 외로이 살고 있고, 차중락인가 하는 가수도 노래 그대로 낙엽 따라 가버렸고... 운운하면서 대여섯 명의 가수의 예를 드는 것이었다. 그 아줌마가 미처 예를 못든 사람도 있으니 김광석도 그랬었고 가수는 아니지만 자살한 영화배우 장국영도 그랬었다. 자살하는 역을 자주 맡으면 실제로 자살하게 되는데 - 물론 백프로 그런 것은 아니다 - 이는 연기에서의 배역이나 인생살이나 그게 그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한편의 긴 연극과 같은 것이다.

켐벨은 우리 인생이란 그리고 우주란 한판의 영극 즉 그림자 놀이라고 했으며 장주는 인생을 호접몽 즉 나비의 꿈에 비유했는데 궁극적으로 보면 인생이란 나중에 가서 돌아보면 아귀가 척척 들어맞는 한편의 커다란 연극이 아닐까? 다만 그 연극이 재밌는 것은 소리와 빛이 있기 때문이니 생각하면 서럽고 아쉬울 게 무에가 있겠는가? 꿈에서 깨고 나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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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심연에서 와서 심연으로 간다. 그 중간을 인생이라 한다.

이처럼 인생이란 심연과 심연의 중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위의 에밀레의 노래처럼 노래구절로나마 저렇게 불리워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의 일생이 특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필자가 죽은 후에 필자의 묘비에는 몇 글자나 새겨질 수 있으려나? 여러분의 묘비석은 어떠한가?
  • 03-10-23 원정
    "산장의 여인을 부른 그 누구야 그 여자 가수는 자기가 부른 노래 그대로 산에 들어가서 외로이 살고 있고, 차중락인가 하는 가수도 노래 그대로 낙엽 따라 가버렸고... 운운하면서 대여섯 명의 가수의 예를 드는 것이었다. 그 아줌마가 미처 예를 못든 사람도 있으니 김광석도 그랬었고 가수는 아니지만 자살한 영화배우 장국영도 그랬었다. 자살하는 역을 자주 맡으면 실제로 자살하게 되는데 - 물론 백프로 그런 것은 아니다 - 이는 연기에서의 배역이나 인생살이나 그게 그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부분을 상당히 공감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말과 자신의 행동이 결국 자신에게 다시 영향을 미치지요.
    그 것을 氣로서 설명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설명을 하든지...........
  • 03-12-03 샛별
    지구인님,제가 지구인님에게 답글을 못 쓰는 이유는요,,사실은요,어려워요^^*내용을 읽다가 보면 시간이 엄떠요^^.잘 계시죠?요즘은 글이 뜸하신데,올려주시는 그림은 너무 좋습니다..행복하세요...^^
    원정님, 장국영 너무 불쌍해요..중요한거는 장국영씨 주위에 그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가 없다는 슬픔입니다...그러면 그런일이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