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나 되리라1

03-10-20 웃음 592
지난 9월 태풍 매미가 목숨껏 울고 간 뒤에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300여 그루의 벚나무들은 일찌감치 겨울 옷을 입었다.
예년 같으면 지금쯤 곱게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에 춤을 추며 가을 얘기를 하고 있을텐데..
그 태풍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그저 찢겨진게 아니라 마치 화상을 입은거 같았다.
낙엽이 쌓인 곳이면 쪼르르 달려가 바스락거리는 소릴 들으려고 일부러도 밟아보곤 했었는데
최근엔 낙엽이 쌓인 곳은 피해서 다녔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을이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꼭 나뭇잎의 비명처럼 들려서.
손으로 문질러 보면 믹스기로 갈았을 때 처럼 완전히 가루가 되버리는게,
그 밤에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까 하는 생각에 벚나무를 쳐다볼때마다 마음 싸아~ 하니 아팠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비 없이 바람만 불어제낀 바닷가에 선 벚나무들은 그 바닷바람에 선 채로 염장되어
죽었을 것이다.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꽃이 피었다. 해마다 4월이면 저가 피워내던 바로 그꽃....
초록빛 다 바랜 잎사귀 하나 욕심껏 매달고 미련을 부릴 수도 없었던 그 나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던 것이다.
아!!!!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그런데 또 걱정이 앞섰다.
태풍 불던 그 한 밤이 서너달의 겨울과 맞먹는 인고의 시간이었을까,
그 바람에 생체시계가 고장이 난 건가...?
곧 있으면 찬서리 내리고 눈 덮일 겨울 올텐데 어쩌자고 지금 꽃을 피워내는지....
"나 살아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나무 앞에서 나는
그가 원치도 않는 걱정을 꽃잎에다 얹져가며 마음 동동거리는데
함께 피어나 있는 개나리며 목련, 제 친구들도 한목소리로 나에게 하는 말

"쓸데없는 걱정이 많기도 하시네요...
내가 피어나는 때를 봄이라 정한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지요.
우린 그저 우리가 피어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꽃망울 터트리고 질 때 되면 질 뿐인데
그게 봄이건 겨울이건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러니...? 그렇구나..그래, 니 말이 맞네...."

더러 잘난 척 해도 난 정말 참 못났다.
바람 불면 스러지고 그 바람 지나면 다시 일어서는 풀이며 나무보다...
계절을 맞고 보내는 일에 마음두지 않는 너 앞에 서 있자니
시련을 맞고 보내는 일에 번번히 힘겨워하는 내가 정말 부끄럽다.

고난이 와도 제 시간 다 하면 가리라 믿으며
나에게 오고가는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담담히 맞고 보내는 그런 나 되어라 염원해 본다.


오늘도 내 삶 앞에 스승으로 서 있는 널 보며 너에게 감사하며...

  • 03-10-21 원정
    살면서 덤덤한 것이 참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