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해를 맞아..1

24-01-14 모모 33

용이라는. 말을 쓸때.  용이 뭘까요?
용은 기운. 변화.  움직임.
등을 형상화한 말이지요.
그래서. 용기.용서.용트림.등으로 기운이 움직이는 말에 사용되는데..
용을 형상화 하여 인격으로 사용하는게.. 용상 .용안.용체.. 왕이나 귀한 사람 등에 붙여. 사용하잖아요.
그리고 그림으로 용은 거대한 기운을 마음대로 일으키고 부릴수 있는..
자유자재 한. 존재로서 형상화 하지요.

관자재보살 또한  용과 같이. 자유자재하게. 기운을 움직이는. 그런 존재로서 형상화했잖아요.
전...그 용이 곧 연기구나. 싶었지요.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관계와 관계속에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어떤 기운을 용으로. 그려낸것이 아닌가 싶었고..
관자재보살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용이 아닌가.  싶고요


그렇다면. 붓다 또한 몸은 사람의 형상이지만..그자체로. 연기.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바라보니...용.아닌건 세상에 없네요.
나도 용.  너도 용. 그 자체잖아요
그러니 그게 연기 아니겠어요.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업 이. 아니겠어요.

용은 명사 같지만 동사지요.
그 자체로 움직임이지요.

불교의 연기. 중도는.  명색을 바르게 통찰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고 움직임이라면

용은 어떤가요.
용도 조건과 관계에서 수없이 변화하는  움직임. 이라고 한다면...
같은거 아닐까요.
그 움직임은 결국 내안의 명색을 바탕으로. 촉하여. 움직이니....

연기는  업의 다른 이름입니다.
촉하는. 조건과 관계로 인해 변화하는 기운.

그럼 용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부처님은. 무아. 곧  나라고 할만한 그 어떤. 주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에 따라  바른 통찰로 잘못된 명색을 바로잡아 나갈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 하셨지요

그게 불교의 중도지요.
그래서 불교는. 중도이며. 연기이며 업의. 도인 것이지요.
무아로서의 공인 것이지요.
 
고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도인것이지요.
그렇다면...용도 연기의 또다른 이름이라 할수 있을까요.
바른 통찰로 일어나는 연기. 용. 업
. 다 같은 말이 아닌가요.

불도는 바른...팔정도로  그 연기를..용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연기.용 이 바로 양날의 검 이 아닌가요.
정도로 사용하면...활인검.

....그리고 그. 활인검 을 형상으로서. 가장 적나라 하게 드러낸 용의 현상 이.  부처님 아닌가요.
관자재보살.
즉 정도에 자유자재한. 보살.부처.
그리고..거기에 주체는 없지요
그저 공 이 있을뿐입니다.

청용의 해에..  그동안 공부해 오던 지식을 용과 결합해 보았습니다.

참고로.. 전 지식면에서 앎이 매우 짧습니다.   잘못 안 것이 있다면 바로 잡아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24-01-16 원정
    저는 깨달음에 있어서 지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의 의미는 지나치게 주관적 착각에 빠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제가 상생에 올려놓은 정도의 지식만 해도 지나치게 넘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교의 근본원리를 사성제(고집멸도)로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즉,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생각(번뇌)의 집적(생각을 붙잡음)에 있다는 것이잖아요.
    결국, 언어와 문자를 통하여 형성된 다양한 지식들(생각의 집적, 분별하는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어떻게 번뇌(생각)를 쉬게 할 수 있느냐(생각을 잡지 않느냐)가 핵심이잖아요.
    그렇게 생각이 쉬어져 공이 저절로 드러나면 그 공의 자리에서는 떠오르는 생각이 잘 보이고 그러면 그 생각들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게 되잖아요.
    그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불교에 대한 교리를 지식으로 안다고 하여 고통이 줄어들지는 안잖아요.

    서양의 각자들인 에크하르트 톨레, 바이런 케이티 같은 사람들이 지식으로 깨달음에 접근한 것이 아니잖아요.
    6조 혜능 이하의 선가의 스승들이 지식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잖아요.
    석가모니도 다른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하고, 모든 인위적인 수행을 포기하였을 때, 비로소 저절로 깨달아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깨달아졌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애초에 어떠한 문제가 없었음이 확인되었다(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표현이 더 좋을 듯도 합니다.

    제가 지금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 이전의 자리’(분별 너머의 자리, 판단이 저절로 중지되는 자리, 공, 불성)에 계합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는 불교의 또는 다른 이론으로 접근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생각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생각이 저절로 쉬어져야 합니다.
    누가 있어 주체적으로 생각을 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저절로 쉬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자동형(쉰다)이 아니라 피동형(쉬어진다)입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깨달은 자의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머리를 떼어 놓았다는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야 합니다.
    이해하려 해서는 더 멀어집니다.
    이해는 에고가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쉬어지게 하기 위하여, 제가 제 나름대로 상생에 적어놓은 내용도 있고요.

    참고로, 저는 ‘용’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용은 필요할 때 인연 따라 저절로 사용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