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님께서는 십우도의 단계와 돈오점수를 말씀하십니다.
돈오라고 하면 무엇(견성)을 봤냐?가 있어야 점수라는 것이 뒤따릅니다.
제가 줄곧 원정님께 말씀드린 것은 돈오에 대한 겁니다.
무엇(견성)을 봤냐는 거지요.
성품을 봐야 성품에 맞게 행동을 하지요.
성품은 ‘나’가 사라지는 경계입니다.
경계라고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표현입니다.
자세한 말은 생략합니다.
원정님께서는 늘 ‘나’즉, 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줄곧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그건 성품을 본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가 어떻게 된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저에게 있어 공에 머문다는 것은 내가 연기를 보고, 아상을 없애가는 수행을 공에 머문다고 답하겠습니다.
(공에 머문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이 또한 말해보라면요.)
흔히 성품을 본 후에 하는 수행과 성품을 보기 전에 하는 수행을 '문 안의 수행과 문 밖의 수행'이라고 하지요.
원정님께 궁금했던 것은 '문 안의 수행이냐?', '문 밖의 수행이냐?'였다는 점 이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