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있다는 패러다임
패러다임이란 말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사상, 사고의 틀을 바꾼다는 의미로 처음 사용하였다. 과학혁명이 신중심주의 서양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왔듯이, 이제 불교도 명상과 기복 우월주의로 마치 불상에 기도하고, 명상만 하면 깨달음을 얻는 마케팅에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죽음이 있다’는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 마치 지금 유일신교(유대교, 이슬람교, 구교,신교를 포함한 기독교)들이 창조신 여호와(야훼)가 있다는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실상과 상관 없이 단지 자신의 생각만으로 창조신 여호와가 있다는 둥 ‘죽음’이 있다는 둥 하면서 견고한 패러다임에 빠져있다. 웃기는 것은 ‘죽음이 있다’는 자신의 생각과 똑같은 패러다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신이 허황된 생각의 화신인 것은 모르고, ‘생각이 없는 것이 공’이라든지, ‘생각이 없는 것이 깨달음에 도달한 자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 있다'는 자신의 생각은 그럼 뭐란 말인가.
잠시 ‘공’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경전에 보면 붓다께서 자신이 공에 머문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나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연기와 중도로서의 ‘공’이라기보다 그 해당 경전에서의 맥락에 의해 욕계에 있는 마음을 선정에 들게 하여 무색계에 머물게 하는 것을 표현하신 것이다. 하긴 붓다께서는 늘 무색계작용만 하시는 마음이시니 욕계의 세간 제자들에게 상대적인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거다. 이러한 맥락 없이 ‘죽음이 있다'는 자신의 생각과 똑같은 기존의 패러다임에 갇힌 자는 맥락으로서의 공도 연기로서의 공에도 머물기가 상당히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죽음이 있다’는 패러다임을 생각해 봐야 한다. 잘못된 패러다임 때문에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붙잡고 있기 때문에 생사가 벌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라는 명사가 없으면 생사가 없다. 주어가 없는데 동사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나’라는 명사가 아니라 다만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이 있어 내가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 바로 생각일 뿐이다. 그 생각을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