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진리탐구의 길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진리탐구를 하게 된 최초의식이 발현된 것은 만 4세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계기는 텔레비전 6.25영화에서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전사하거나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였다. 어린 나는 밤에 누워서 왜 사람은 저렇게 속절없이 죽어가야 되는가를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육신이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저 내가 무덤에 누워있는 상상을 했고, 무덤 속에서 겪는 답답함을 느껴 소스라쳤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인생 줄곧 따라다녔던 폐쇄공포증이 시작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답답한 것 외에는 특별히 죽음의 공포나 고독같은 것은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초롱불 조명으로 반사되는 천정을 무덤 천정마냥 바라보기를 즐겼는데(?), 천정에는 만다라 같은 하늘의 그림이 가득히 그려지곤 했다.
소도시 작은 동네에서는 장례식 소식도 가끔씩 들려왔다. 동네 어른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이 관 속에서 머물다가 상여가 나가는 날 관에서 나와 집 지붕 위로 혼이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어린 나는 그 혼을 보기 위해 장례식이 시작되면 그 집 앞에서 눈이 뚫어져라 지붕에서 혼이 나가는 모습을 감시(?)했다. 어린 나의 눈에는 혼이 나가는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헛것이었겠지만, 내가 본 그 작은 불꽃의 반짝임이 죽은 그 사람의 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시절에는 학업진행과정에서 선행수업이라는 것이 없었다. 특별한 계층에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학교 다니고 방과 후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어린 나는 달랐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고 본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오직 혼자서 선행수업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2년 세월동안 나는 혼자의 힘으로 한글을 익혔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궁금할 뿐이다. 공부하는 방식은 이랬다. 유치원생인 난 초등학생 아이들이 모두 학교가거나 방과 후 놀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의 숙제를 자청해서 대신 해줬다. 만4세부터 만6세, 그러니까 지금의 유치원생 과정과 같을 시기에 초등학교 전 과정의 숙제를 그 어린 아이가 대신했었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그들은 가방을 던지고 나서 내게 숙제를 맡기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전과를 펴서 반대말 비슷한 말 등 선생님이 적어오라는 것을 적어 주었다. 내 방에는 학년이 지난 교과서들이 도배되어 있었는데(그때는 신문지나 헌책 같은 것을 도배로 사용하기도 했음) 그것을 보고 글을 익힌 것 같은데 무슨 연유로 내게 문자가 인식되는 과정을 거쳤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으니까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시험만 쳤다하면 100점을 맞았다. 당연히 전교1등이었다. 틀리는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되는 시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사춘기는 진리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되었다. 그 의문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와는 판이했다.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같은 거대한 혼란으로 나를 흔들어댔다. 결국 그 쓰나미는 나의 모든 관계망을 끊어 버리고서 오로지 자신이 가리키는 곳으로만 질주하게 만들었다.
쓰나미의 핵은 의문이었다. 하나의 의문이 다가오면 의문을 해결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 의문의 공격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나는 늘 고통스러워했고 환청과도 같이 의문이 다가오면 죽음을 피하고자했던 진시황제처럼 피할 곳을 찾아 헤매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할 수 없었듯이 나또한 피할 곳을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의문의 포로가 되어 나를 묶어야했다. 유일한 길이었다.
결국 중학교2학년 되는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학과공부를 하지 못했다. 수업시간 몰래 교과서 밑에 의문에 답을 해 줄 책을 숨겨놓고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 철학책이었지만 소설이나 시집과 만화책도 있었다. 당연히 학교시험은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해서 겨우 넘겼다. 그래도 중학교졸업은 기본 바탕이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 중상위권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내 학업의 기본내공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진 것 같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왜 존재하는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물음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는 폐인의 생활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학교공부만 맥이 끊긴 건 아니었다. 천주교신자였던 나의 종교생활도 이중생활로 접어들었다. 기독교의 모순에 대해 물음만이 늘어날 뿐이어서 믿음은 날이 갈수록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나도 모르게 영감처럼 기독교에 대한 모순을 채워 줄 대답들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동양철학이었다. 노자와 장자를 접하다가 자연스럽게 불교로 접어들게 되었다.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불교수행자들이나 선이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공부와 종교생활조차 방해물이었던 나에게 그런 방식들은 씨가 먹힐 리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묻고 공부하고 혼자서 답하고 하는 식으로 의문을 해소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다. 그 선지식은 마치 <티벳사자의 서>를 적은 파드마삼바바처럼 책을 한 권 소개해 주었다. 그 책이름은 틱낫한 스님의 <화>이었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그 책을 읽자마자 내가 평생 불교를 수행해 온 것인 양 불교에서 쓰는 용어들이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걸 넘어 그 깊은 의미마저 꿰뚫어졌다. 그 선지식은 당시 불교의 진리를 과학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고려대물리학과 양형진 교수의 글들도 소개해 주었다. 틱낫한 스님과 소통이 된 상태에서 접하는 양형진 교수의 글들은 그동안의 내 모든 의문의 열쇠를 가져다주는 효과를 거두게 해주었다. 운 좋게도 나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정재승 교수의 <과학콘서트>도 읽게 되었는데 세 분의 조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서 나를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해 주었다.
그 차원은 공의 세계였다. 공이란 말이 그 사건 이후로 참으로 쉽게 쓰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쩌면 한 번도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 내지 않았던 한 존재의 입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이 방언처럼 나오는 것도 스스로 신기했다. 지금도 여전히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의문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