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진리탐구의 길15

22-05-04 여원 84

내 진리탐구의 길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진리탐구를 하게 된 최초의식이 발현된 것은 만 4세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계기는 텔레비전 6.25영화에서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전사하거나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였다. 어린 나는 밤에 누워서 왜 사람은 저렇게 속절없이 죽어가야 되는가를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육신이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저 내가 무덤에 누워있는 상상을 했고, 무덤 속에서 겪는 답답함을 느껴 소스라쳤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부터 내 인생 줄곧 따라다녔던 폐쇄공포증이 시작되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답답한 것 외에는 특별히 죽음의 공포나 고독같은 것은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초롱불 조명으로 반사되는 천정을 무덤 천정마냥 바라보기를 즐겼는데(?), 천정에는 만다라 같은 하늘의 그림이 가득히 그려지곤 했다.

 

소도시 작은 동네에서는 장례식 소식도 가끔씩 들려왔다. 동네 어른들은 사람이 죽으면 혼이 관 속에서 머물다가 상여가 나가는 날 관에서 나와 집 지붕 위로 혼이 빠져나간다고 말했다. 어린 나는 그 혼을 보기 위해 장례식이 시작되면 그 집 앞에서 눈이 뚫어져라 지붕에서 혼이 나가는 모습을 감시(?)했다. 어린 나의 눈에는 혼이 나가는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헛것이었겠지만, 내가 본 그 작은 불꽃의 반짝임이 죽은 그 사람의 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시절에는 학업진행과정에서 선행수업이라는 것이 없었다. 특별한 계층에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네 아이들은 학교 다니고 방과 후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어린 나는 달랐다. 아무도 시키지도 않았고 본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오직 혼자서 선행수업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2년 세월동안 나는 혼자의 힘으로 한글을 익혔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궁금할 뿐이다. 공부하는 방식은 이랬다. 유치원생인 난 초등학생 아이들이 모두 학교가거나 방과 후 놀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의 숙제를 자청해서 대신 해줬다. 만4세부터 만6세, 그러니까 지금의 유치원생 과정과 같을 시기에 초등학교 전 과정의 숙제를 그 어린 아이가 대신했었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그들은 가방을 던지고 나서 내게 숙제를 맡기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전과를 펴서 반대말 비슷한 말 등 선생님이 적어오라는 것을 적어 주었다. 내 방에는 학년이 지난 교과서들이 도배되어 있었는데(그때는 신문지나 헌책 같은 것을 도배로 사용하기도 했음) 그것을 보고 글을 익힌 것 같은데 무슨 연유로 내게 문자가 인식되는 과정을 거쳤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으니까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시험만 쳤다하면 100점을 맞았다. 당연히 전교1등이었다. 틀리는 게 없었으니까. 그렇게 공부를 잘하던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되는 시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사춘기는 진리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되었다. 그 의문은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와는 판이했다. 감당할 수 없는 쓰나미같은 거대한 혼란으로 나를 흔들어댔다. 결국 그 쓰나미는 나의 모든 관계망을 끊어 버리고서 오로지 자신이 가리키는 곳으로만 질주하게 만들었다.

 

쓰나미의 핵은 의문이었다. 하나의 의문이 다가오면 의문을 해결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 의문의 공격이 어찌나 강력했던지, 나는 늘 고통스러워했고 환청과도 같이 의문이 다가오면 죽음을 피하고자했던 진시황제처럼 피할 곳을 찾아 헤매었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할 수 없었듯이 나또한 피할 곳을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의문의 포로가 되어 나를 묶어야했다. 유일한 길이었다.

 

결국 중학교2학년 되는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학과공부를 하지 못했다. 수업시간 몰래 교과서 밑에 의문에 답을 해 줄 책을 숨겨놓고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 철학책이었지만 소설이나 시집과 만화책도 있었다. 당연히 학교시험은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해서 겨우 넘겼다. 그래도 중학교졸업은 기본 바탕이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 중상위권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내 학업의 기본내공은 그 지점에서 멈추어진 것 같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왜 존재하는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물음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는 폐인의 생활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학교공부만 맥이 끊긴 건 아니었다. 천주교신자였던 나의 종교생활도 이중생활로 접어들었다. 기독교의 모순에 대해 물음만이 늘어날 뿐이어서 믿음은 날이 갈수록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나도 모르게 영감처럼 기독교에 대한 모순을 채워 줄 대답들이 들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동양철학이었다. 노자와 장자를 접하다가 자연스럽게 불교로 접어들게 되었다.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불교수행자들이나 선이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에는 관심이 없었다. 학교공부와 종교생활조차 방해물이었던 나에게 그런 방식들은 씨가 먹힐 리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묻고 공부하고 혼자서 답하고 하는 식으로 의문을 해소시켜 나갔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지식을 만나게 되었다. 그 선지식은 마치 <티벳사자의 서>를 적은 파드마삼바바처럼 책을 한 권 소개해 주었다. 그 책이름은 틱낫한 스님의 <화>이었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그 책을 읽자마자 내가 평생 불교를 수행해 온 것인 양 불교에서 쓰는 용어들이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걸 넘어 그 깊은 의미마저 꿰뚫어졌다. 그 선지식은 당시 불교의 진리를 과학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고려대물리학과 양형진 교수의 글들도 소개해 주었다. 틱낫한 스님과 소통이 된 상태에서 접하는 양형진 교수의 글들은 그동안의 내 모든 의문의 열쇠를 가져다주는 효과를 거두게 해주었다. 운 좋게도 나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정재승 교수의 <과학콘서트>도 읽게 되었는데 세 분의 조합이 시너지효과를 일으켜서 나를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게 해 주었다.

 

그 차원은 공의 세계였다. 공이란 말이 그 사건 이후로 참으로 쉽게 쓰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어쩌면 한 번도 깨달음을 얻고자 마음 내지 않았던 한 존재의 입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이 방언처럼 나오는 것도 스스로 신기했다. 지금도 여전히 신기할 뿐이다. 그리고 더 이상 의문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22-05-04 원정
    여원님에게는
    모양도 없고, 색갈도 없고, 맛도 없고, 위치도 없고, 안밖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물건이 있는가요?
  • 22-05-04 hanaloum
    인생문제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원님의 인생문제가 부처님이 출가하시 전부터 가지신 의문과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 22-05-04 여원
    없다는 것은 無인가요?
    있다는 것은 有인가요?
    無는
    有는
    한 몸입니다.
    無는 有를 한 축으로 두고
    有는 無를 한 축으로 두고
    있는
    한 몸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게 없어야 無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고
    없는 게 있어야 有라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즉,
    有는 無를 바탕으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합니다.
    無는 有를 바탕으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합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둘이 같이 나타나고
    둘이 같이 사라지는 것이지,
    따로 각각 독립적으로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有 따로
    無 따로
    존재해지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낮의 밝음은
    곧 밤의 어둠으로
    변합니다.
    낮의 밝음이 어둠으로
    잠시 변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단독으로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그 둘이 요술을 부려서
    이렇게 저렇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과 함께 한 어떤 조건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그 둘과 그 둘을 변하게 한 조건에
    그 둘과의 동일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봅시다.
    현상으로 봤을 때,
    밝음이라는 현상으로 봤을 때
    밝음을 있게 한 것은 밝음일까요?
    조건일까요?
    아니면 그것들의 합작품일까요?

    일단,
    있음과
    없음
    그리고
    위치와 안팎은
    조건들에 의해
    즉, 연기에 의해
    번쩍번쩍할 뿐입니다.

    아니 바라보는 특정한
    마음이 없다면
    번쩍거리는 일도
    없습니다.
    밝음은 그런 밝은 생각이 없고
    어둠은 그런 어두운 생각이 없고
    특정한 마음만이
    번쩍번쩍했을 뿐입니다.

    마음이 그 마음을 내니까
    ‘밝다’라든지
    ‘어둡다’라든지가
    결정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그것을 있게 한
    즉,
    원정님께서
    말씀하신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물건은 그것들의 모태인가요?
    그것들과 따로 떨어져서 명령을 내리는
    프로그래머인가요?

    (상호작용
    혹은
    동일체라는 관점)

    우리 몸의 구성성분들은
    우리 몸속에서 각자
    개체로서 생생하게 존재하면서
    동시에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몸이라는 것과 동일체입니다.
    한 몸입니다.
    서로가 있으면서 같이 있고(생존)
    서로가 없으면서 같이 없어요.(소멸)

    원정님께서는
    혹시라도
    원정님 따로
    그 물건 따로 국밥을 상상하시나요?
    그런 법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우리 인간을 일컬어 소우주라고
    말합니다.
    최근 저는 저를 포함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개체들을
    다중우주 중의 하나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빅뱅과 양자물리학의 영향으로
    다중우주를 과학자들은 추론하고 있고,
    다중우주를 찾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궁금했어요.
    우리 우주 끝으로 가면 다중우주들이
    줄지어 서 있을까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죠.
    그러다가 문득
    그 다중우주가 우주만물 개체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空덕분이죠. 순전히…)

    그렇게 본다면
    원정님께서
    생각하는 그 자리(空,참나)인
    한 물건과
    중생인 그 원정의 육신과
    때로는 부처인 그 원정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물건인 원정님이라는 현상과
    둘이겠습니까?
    한 몸이겠습니까?

    그 다중우주들(우주만물)은
    한 점으로부터 나왔고,
    그 다중우주들(우주만물)은
    한 점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법칙을 알게 됩니다.
    그건
    내가 거기서 나왔고
    내가 거기로 돌아간다는 것을요.

    내가 거기서 나올 때는
    다 끌고 나왔고(연기)
    나는 나오는 존재였고
    동시에 나는 돌아가는 존재일 것이고(중도)
    나는 끌고 나온 것들의 조력 없이는
    나올 수도 없고
    나를 끌고 나오는 것들은 나를 끌고 나와야
    나올 수 있으니까
    각자 개체일 수가 없고(무아)
    이 모든 것의 작용은 한 몸으로 봤을 때는
    개체가 비어있고
    이 모든 것의 작용은 개체로 봤을 때는
    한 몸이 비어있는(공)
    의 법칙을 알게 됩니다.(참나)

    각 개체들은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마치
    우리 몸속의 성분들이
    개체이면서
    우리 몸과 하나인 동일체로
    같이 죽고
    같이 살아가는 것처럼.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동안 그 물건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로
    여러 가지 말들을 했습니다.
  • 22-05-04 원정
    제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원님은 그게 없군요.
    그게 없으면 힘들어요.
    힘이 없어요.
    여원님은 생각(아상) 속에서 깨달은 거에요.
    여원님은 2번 째 화살을 피하시기 힘들거에요.
    일부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게 있어야 힘이 생겨요.
    업장(분별하는 습관)을 녹여낼 힘.
    여원님은 '깨달은 나'가 없어지기 힘들 겁니다.
    '고통을 느끼는 나'가 없어지기 힘들 것입니다.
    불법을 이해한 것은 한편으로는 대단하지만,
    그 이해가 오히려 진전을 방해할 것입니다.
    '분별하는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원님이 느끼는 것 보다 실제적인 자리(관념적인 자리가 아닌)가 있어요.
  • 22-05-04 여원
    나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 그 자리입니다.
    본성은 드러나고 숨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죠.
    다만 본성이 숨었을 때 숨었다고 여기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나를 떠난 특정한 그 어떠한 有가 있다라면
    그건 신앙이지 신심은 아니라고 봅니다.
    불교라고 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극락이며 천국이고 신입니다.

    (원정님의 그 자리는 불교의 그 자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불교보다 훨씬 더 나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불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만 깨달으면 충분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도 그것이 빠져있을 때는 돌아올 곳이 없어
    방황했습니다.
    한 가지를 깨닫고 나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자성이 없다는 그 열쇠만 가지면 다시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자성이 없다는 것만 알뿐!
    나머지는 오직 모를 뿐!
  • 22-05-04 원정
    제가 말하는 한 물건에 계합되면,
    왜 '참나'라고 말하였는지,
    왜 '무아'라고 말하였는지,
    왜 '중도', '불이'라고 말하였는지,
    왜 '연기'라고 말하였는지,
    왜 '공'이라고 말하였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해(생각)가 필요하지 않아요.

    한 물건에 계합하기 이전에 경전공부를 통하여 먼저 이해하게 되면
    문자(분별)에 구속되기 마련입니다.
    사과라는 문자를 안다고 하여 사과의 참맛을 알 수는 없어요.
    왜 불가에 '화두선' 또는 '직지인심'이라는 말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 22-05-05 원정
    여원님의 "자성이 없다는 것만 알뿐!"은
    불교의 '불이법' '중도'와 모순되는 말입니다.
    제가 여원님이 하고자 하는 말뜻(연기를 생각하시면서 고정된 성품은 없다로 해석하시는 듯)은 이해하지만.

    여원님의 말씀대로 본성(자성)은 드러나고 숨기를 반복하지 않아요.
    항상 드러나 있어요.
    변함없이....
    변함없는 것은 그 것밖에 없어요.
    왜 그 자리를 '참나'라고도 표현하겠어요.
  • 22-05-05 원정
    그 자리는 정말로 '모르는 마음'이에요.
    왜냐?
    안다고 생각하는것은 '에고(분별하는 생각)'이에요.
    그 분별심이 쉬어지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요.
    왜냐?
    모든 사람들은 그 본성에 의지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여원님은 지금 '깨달은 나'가 존재해요.
    그 때는 절대로 그 본성이 드러나지 못해요.
  • 22-05-05 여원
    그 자리(諸法無我),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은 ‘無我’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깨닫는다는 것의 시작과 끝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공염불입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게 1도 없습니다.

    ‘無我’를 ‘그 자리’라고도 합니다. 묘한 원리에 대해 ‘성품’, ‘본래면목’, ‘일원상’등이라고도 하지요.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 자리’는 어떤 상태(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고, 맛도 없고, 위치도 없고, 안팎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는 한 물건)로서 여여한 곳에 편재되어 있거나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말로는 위치도 없고 맛도 없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다면 어긋나 버립니다.

    ‘그 자리(無我)’에서 어긋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계합하는 진정한 의미는 나를 떠나서는 그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인데, 오히려 ‘그 자리(無我)’라는 상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식이 그 자리에 가서 계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깨달음 의식 따로, 그 자리 따로 합체가 아닙니다. 원래 계합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부족한 표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그 순수의식이 곧 그 자리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깨달음의 순간 ‘나(我)’가 증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본래 한 몸이었는데 따로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매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我)’를 증발시키고 보니 ‘그 자리(無我)’의 드러남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나(我)’가 증발하고 없는데, 분별이 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있어 분별하고 있습니까?

    ‘분별’은 끊임없이 왔다가 가기를 하겠지만, ‘분별’에 분별의 ‘나(我)’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는데요.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 바라보기’는 뗏목입니다. 선을 통하든지, 교를 통하든지 그건 말 그대로 수단일 뿐입니다. 생각과 분별이 끊어진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닙니다. 생각이 있어도 생각의 ‘나(我)’가 없는 자리이며, 분별이 있어도 분별의 ‘나(我)’가 없는 자리입니다.

    ‘생각하는 자 바라보기’, ‘명상과 선’은 불교의 핵심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닙니다. 물론 경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무방합니다. 다른 수단과 방법이 없을 때 강구해 보는 경우의 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과 분별이 끊어진 자리가 있다하더라도 그 자리에 ‘그 자리’라는 ‘나(我)’, 즉 상이 있다면 그건 엄연히 ‘나(我)’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無我’이므로 연결되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모두는 한 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無我)’와 원정님은 한 몸으로 스스로 그러한데 원정님께서 분별을 내어 자꾸만 ‘그 자리(無我)’에 거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써 생각과 분별을 그렇게 눈물겹게 알아차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조지폐를 알아내는 방법은 위조지폐의 종류를 모두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그럴 시간에 진짜 지폐를 확실하고도 정확히 알면 됩니다. 설명은 절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원정님 말씀처럼 사과의 맛을 보지 못한 자에게 사과의 맛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차선책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것의 수단은 데이터와 통계를 통하여 파악하는 것이죠. 데이터와 통계는 실체는 아니지만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역학 같은 것이며 경전이나 선과 명상도 포함됩니다. 이런 방법이 제일 가능성에 도달할 확률이 높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로 정해진 길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불교의 정법도장은 있습니다.
    ‘그 자리(諸法無我)’는 이름이 무엇이든 수단이 무엇이든 상관은 없지만, ‘나(我)’가 있으면 어긋납니다. ‘그 자리(諸法無我)’라는 상이 있다면 ‘그 자리(諸法無我)’라는 생각과 분별이 있을 뿐입니다. 불교의 깨달음 그 시작과 끝은 ‘諸法無我’이며, 이것을 표방하면서도 ‘諸法無我’라는 상을 세운다면 ‘諸法無我’의 신앙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 22-05-05 여원
    여원님의 말씀대로 본성(자성)은 드러나고 숨기를 반복하지 않아요.
    항상 드러나 있어요.
    변함없이....
    변함없는 것은 그 것밖에 없어요.
    왜 그 자리를 '참나'라고도 표현하겠어요.
    ―――――――――――――――――――――――――
    잘 아시네요. 본성은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내가 깜빡깜빡한다고 본성 자체가 깜빡깜빡하는 것이 아니니까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성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면 깜빡깜박해도 깜빡깜빡만 흘러보내면 되는 것이죠.
  • 22-05-05 여원
    그 자리는 정말로 '모르는 마음'이에요.
    왜냐?
    안다고 생각하는것은 '에고(분별하는 생각)'이에요.
    그 분별심이 쉬어지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요.
    왜냐?
    모든 사람들은 그 본성에 의지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여원님은 지금 '깨달은 나'가 존재해요.
    그 때는 절대로 그 본성이 드러나지 못해요.
    ―――――――――――――――――――――――
    원정님,
    모르는 마음이나
    아는 마음이나
    동전의 양면입니다.

    모르는 마음이라는 ‘나(我)’
    아는 마음이라는 ‘나(我)’
    를 세우지 않으면 되죠.

    분별이 쉬어지면 드러나는 자리가
    맞지만,
    원정님의 그 자리는 아닙니다.
    원정님의 그 자리에는 ‘그 자리’라는
    ‘나(我)’가 있기 때문입니다.
  • 22-05-05 여원
    여원님의 "자성이 없다는 것만 알뿐!"은
    불교의 '불이법' '중도'와 모순되는 말입니다.
    제가 여원님이 하고자 하는 말뜻(연기를 생각하시면서 고정된 성품은 없다로 해석하시는 듯)은 이해하지만.
    ―――――――――――――――――――――――――
    자성이 없다는 것이 중도이며, 불이입니다.
    그럼 안다고 하지 모른다고 합니까?
    문자의 한계입니다.
  • 22-05-05 여원
    여원님의 말씀대로 본성(자성)은 드러나고 숨기를 반복하지 않아요.
    항상 드러나 있어요.
    변함없이....
    변함없는 것은 그 것밖에 없어요.
    왜 그 자리를 '참나'라고도 표현하겠어요.
    ―――――――――――――――――――――――――
    바위는
    들꽃은
    우리같이 몸을 가진 이들처럼 착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몸의 한계성이죠.
    몸이 본성을 가리기도 하고 그러죠.
    그럴 때라도 알면 됩니다.
    본성은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을요.
  • 22-05-06 원정
    오로지 제 주관적 관점을 말하면...

    여원님이 상생에 머무는 한 여원님의 에고는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제 에고와 함께 여원님의 에고도 타버릴 거예요.
    겉으로 보기에 지금은 여원님의 에고가 온 몸으로 저항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이미 여원님의 에고도 금이 갔지요. 여원님의 영적 지능이 천재인데 여원님의 본성이 모르겠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여원님의 깨달음의 퍼즐에 틈이 있음을 느낄 텐데요.
    저도 잠시 속았을 정도로 여원님의 깨달음의 퍼즐은 놀라웠어요.^^

    저와 여원님의 인연이 왜 이렇게 특별하고 질긴지 모르겠어요.^^
  • 22-05-06 여원
    마음이 있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이 마음에서 인간은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것에 속박되어 살아간다.
    그런 인간이 마음의 장난에 대해서도 컨트롤할 수 있는 깨달음을 발견하였다.
    위대한 사건이다.
    마음의 장난에 내가 개입한다는 것이 깨달음의 역사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불교는 ‘바로 지금 여기’를 해결한다.
    불교가 아닌 것들은 ‘바로 지금 여기’를 떠나서 해결된다고 약속한다.
    나는 불교가 좋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