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대한 나의 의견/원정님께6

22-04-07 여원 38

마음에 대한 나의 의견

 

1. 전체(현존, 깨달음, 부처, 참나, 신, .....)로 산다는 것

 

나는 어느 시점에서 개체가 완전한 전체로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개체가 완전한 전체로 살게 되면 그 개체는 구심점을 잃고 흩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 구심점이 인간에게는 에고일수 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돈오돈수를 말했지만 나는 성철스님으로부터 에고를 느꼈고, 나는 법정스님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 분의 글에서도 에고를 느꼈다. 깨달았다거나 견성을 했다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에고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물이나 바위 등 무생물에서는 에고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죽으면 내 에고도 사라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개체가 완전한 전체로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이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법 안에서는 개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개체라는 현상이 생기기 때문에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현상 또한 근기에 따라서 현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나 인식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존재가 느끼고 보는 것은 그 존재에 국한된 것이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성철스님에게서 에고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성철스님은 열반송에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니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에고(개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에고(개체)’로 존재했지만, ‘에고(개체)’만 느끼고, ‘무아(전체)’를 보지 못한다면 “나는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라”이렇게 탄식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탄식하지는 않았겠죠. 어차피 언젠가는 자신의 본심은 알 것이라고 믿지만, 그래도 역설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면서 다시 한 번 당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전체)를 가리키면 달(전체)를 봐야지 왜 손가락(에고)을 보고 있나?”

 

그렇다면 수행이나 명상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는 것일까? 인간은 진화를 하면서 생각(전두엽)과 감정(정보를 취사선택하여 저장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글을 읽은 것 같다)도 생존에 유리하도록 진화를 한 것 같다. 세상 모든 것에는 장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과 감정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생각과 감정을 제3자적 관점에서 가만히 지켜봄으로써(명상) 그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순간순간 가장 적합한 판단을 할 수 있어 보인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에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또한 생각과 감정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는 매우 큰 것으로 보이는데, 명상하는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이 끊어지면 내 몸 안에는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것 같다. 명상을 할 때 알파파가 나오는데 잠을 잘 때도 알파파가 나온다. 동물들은 왜 잠을 자는지 알 것도 같다. 우리는 명상의 삶을 살면서(전체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더 이상 집착에서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다만, 생각이나 감정에는 죄가 없다.

전체로 산다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에고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편으로 보인다.

‘선(禪)’, ‘명상(冥想)’이란 분별심이 사라진 자리에 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자리가 바로 ‘진여(眞如)’의 자리죠.

그 자리는 광명의 자리입니다. 어떠한 ‘에고(개체)’도 방편으로 화하는 빛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조차도 어떤 희미한 빛을 가리켜 ‘에고(개체)’를 본다면 그 자리(진여)는 요원합니다. 나의 에고도 너의 에고도 ‘에고(개체)’일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2. 일체유심조

 

마음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어떤 마음(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우주의 모든 것들의 모습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원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면 그 일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얼마나 갈망하느냐의 문제인 것도 같다. 끌어당김의 법칙, 기복신앙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플라시보효과나 머피의 법칙이 뜻하는 의미도 생각하는 대로 결과가 나온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기도를 하면 그 기도의 결과가 이루어졌던 것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인디언 기우제처럼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하면 그 결과는 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인간의 의지론(비결정론)을 좋아했는데, 살면서 결정론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다. 자라나면서 잠재의식(아뢰아식)에 자연스레 축적된 정보나 습관 등은 살면서 자연스레 풀려나오게 되어 있다. 내 잠재의식에 어떤 것들이 숨어있는지 자세히 살펴보지 아니하면 나는 내 잠재의식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내 삶은 결정론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내 잠재의식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면(잠재의식에서 풀려나오는 내 생각이나 습관이나 감정을 순간순간 바라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잠재의식에 숨어있는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덜 받을 수 있어 보인다. 잠재의식에 있는 내 생각과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즉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이 것이 부활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나 습관을, 진정으로 원하는 생각이나 감정을 잠재의식에 자연스레 입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나는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이 우주는 에너지 장인 것 같다. 모든 물질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 같다. 그 중량에 따라서 주고 받는 힘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내 마음도 에너지이다. 그러니 내 마음은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체(연기)’를 깨달았다면, 마음 또한 ‘에고(개체)’의 마음이 아니라 전체의 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식(識)’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주의 원리부터 원자 나아가 현재까지 밝혀진 초끈까지 알아야 합니다. 식물을 알아야 하고, 미생물과 암흑물질 암흑에너지도 알아야죠. 이러한 자세가 진정한 자세입니다.

그 모든 게 다 나이기 때문입니다.

즉자적 존재, 대자적 존재로 왔다갔다 해서는 계속하여 다람쥐쳇바퀴입니다.

 

3. 결론

 

명상을 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지혜롭게 살 수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에너지가 충만된 삶을 살수도 있다.

또한, 원하는 바를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기면(잠재의식에 입력하면) 그 결과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021. 6. 8.

  • 22-04-07 원정
    그날의 원정은 이미 없어요.
  • 22-04-07 원정
    여원님은 끊임없이 여원님 생각(분별)을 말씀하시고 계시네요.
    제가 여원님의 위 글이 옳다고 해도 공(중도)의 자리에서는 벗어난 것이고, 틀리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는 벗어난 것입니다. 왜냐? 그 자리는 분별 이전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원님의 생각이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은 여원님의 '생각'일 뿐이다"라는 말에 집중하세요. "여원님이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자가 존재함을 말하고 있음"에 집중하세요. 이 건 차원이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 22-04-07 원정
    여원님은 생각으로 부사를 그리기도 하시고, 홍로를 그리기도 하시고, 국광을 그리기도 하십니다.
    제가 그걸 뭐라 하는 것이 아니에요.
    홍로를 그리는, 부사를 그리는, 국광을 그리는 그 생각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원님의 생각은 조건이 바뀌면 다시 바껴요.
    그렇지만 그와 같은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자가 있어요.
    그 자를 인지하라는 거예요.
  • 22-04-07 원정
    그 자리는 맞다고 해도 벗어나고, 틀리다고 해도 벗어나요.
    모두 생각(분별)이잖아요.
    그 자리는 분별 이전의 자리에요.
    그래서 공이고, 중도예요.
    그 자리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안다는 마음은 이미 생각(분별)입니다.
    그 자리는 '오직 모를뿐'입니다.
    그래서 '침묵'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는 모든 생각이나 감정을 그저 무심히 평등하게 바라봐요.
    '행복감'과 '불행감'도 평등하게 바라봐요.
    (근원적으로 행복감 불행감은 생각이 분별한 것이지만....)
    그래서 '내 생각' '내 감정'들도 마치 별과 달을 바라보듯이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여원님의 위 글을 다시 읽어 보세요.
    뭔가 아신다는(분별한) '생각'으로 쓰신 글이잖아요.
    그 생각을 낼 때, 그 걸 알아차리는 자에 집중하세요.
    생각 속에서 생각하지마시고.....
  • 22-04-07 원정
    지금 머리 속에서 백두산을 떠올려 보세요.
    백두산 이미지가 떠오른 것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잖아요.
    그 자에 집중하세요.
  • 22-04-13 원정
    여원님의 글을 다시 모두 읽어보니 제 입장에서 틀린 말은 없어 보이네요.
    저는 여원님이 생각으로 말씀하신다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제가 누굴 평가할 입장은 못되지만, 여원님의 " ‘생각은 현상이다’라고 바로 알아차리면 생각은 생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바로 사라집니다."는 단순히 해오한 사람이 할 말을 넘어선 것 같아요.

    또한, 저는 잠깐 뭔가 느꼈다고 생각한 사람의 입장에서 답글을 달았고,
    '불이'의 관점에서는 대상이 존재하죠.
    제가 누굴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제가 여원님을 오해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