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금하다 .
성경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원수’라는 단어가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데 놀랐다.
원수를 상정해 놓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느낌......나의 마음에는 그 당시 원수가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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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원수를 불교에 대입해 보면 ‘중도’입니다. 원수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걸 가르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불교에 접하기 전까지 윤회를 몰랐다.
일단 태어나면 살다가 그냥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이 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윤회를 한단다.
불교 수행자들은 윤회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불교 신도들에게도 윤회를 두려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윤회라는 관점도 없었고, 윤회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윤회를 두려워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윤회가 두려워지지 않는다.
은밀히 따지면 ‘윤회’는 붓다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나라 불교가 칠성각과 산신각을 수용하듯이 그런 측면에서 수용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아니지만, 설사 윤회한다고 해도 붓다의 가르침은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윤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이상하다.
윤회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왜 수행자일수록 윤회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삶이 ‘고통(苦痛’)이라는 관점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왜 윤회가 두렵단 말인가?
윤회를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가 에고의 관점이 아닌가?
그렇게 나약한 수행자의 체험에서 나온 말들을 우리는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수행자는 모르겠지만 깨달은 자는 윤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삶또한 깨닫지 못했을 때가 고통이지 깨닫고 나서는 고통이 아닙니다. 그 이유의 근거는 깨달음의 요체가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아(에고)’가 ‘무아’즉, 없다라고 깨달았는데 누가 무엇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까. 두려워하는 ‘아(에고)’도 없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 ‘아(에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깨달아놓고서 자꾸만 있지도 않는 ‘아(에고)’를 안고살지는 않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네안데르탈인을 현생에 데려오면 그들은 행복할까?
불교에서 인정하고 있는 참나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2차원 평면에서 사는 뱀보다 3차원 공간에서 사는 사람이 더 고차원적으로 산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나는 팝송이 좋은데 오폐라가 더 차원이 높은 음악이라고 모두 인정한다고 하여 그 지겨운 오폐라를 나는 계속 들어야 하는 것인가?
결국 차원이라는 것은 에고의 관점이 아닐까?
만생만물은 모두 각자의 우주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네안데르탈인 또한 현상입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진리에 차원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 시점의 우주와 지구의 조건에 지금의 우리를 갖다놓으면 우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네안데르탈인으로 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상은 조건따라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차원이란 이런 것입니다.
가로축과 세로축이 있다고 칩시다.
어떤 존재가 가로축과 세로축 교차점에 있습니다. 교차점에 있는 존재가 자기는 가로만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로세로를 다 보는 이가 “너는 가로세로 교차점에 있어”라고 말한다면 차원이 높은 거죠. 그런 문제를 “나는 가로가 좋아, 너는 세로가 좋니?”, “아무거나 좋아하면 되지.”이렇게 말하다면 억지입니다. 호불호하고 차원하고는 다른 문제인 것이죠.
다시 말하지만, 깨닫는다는 것은 ‘아(에고)’가 ‘무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꾸 자신의 생각을 또다른 무엇을 ‘아(에고)’라고 ‘상’을 가진다면 무모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무아’인데, 왜 ‘아(에고)’가 있다고 생각하지? 하면서 그 ‘상’을 깨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비추어보면 ‘아(에고)’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자들이 나왔지만 이 지구에는 왜 정의가 없고 약육강식만 존재하는가?
깨달음이란 기술직 직업군들의 재능처럼 하나의 삶의 기술(지혜로운 기술)을 하나 더 장착하는 것은 아닐까?
수행자들은 진리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진리란 자신들이 깨달은 약간의 결과에 자신들의 에고의 관점을 버무려 설교를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내 관점에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명상은 새로운 지혜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그 이외의 나머지는 모르겠다.
‘아(에고)’가 ‘무아’라는 깨달음을 얻은 무수한 이들 때문에 이 세상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편재되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보면 그분들의 은혜가 한량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네게 ‘주시자’가 다가왔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가 궁금하다. 그래서 그를 알고 싶다.
다만, 그를 주시하여 신선이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그 자리에서는 어떠한 통찰이 나올지 궁금하다. 그 것은 주시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위 궁금함을 모두 내려놓고 주시자를 주시하기로 결심했다. 주시자에게 맡기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 ‘주시자’에게 집중하십시오. ‘아(에고)’에 대한 생각은 타파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