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5일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다. 전체속의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이미 부분으로써 전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2014년은 내게 헛되지 않았다.《투명인간/성석제 장편소설/창비/2014,6》을 읽을 수 있어서.
단연 최고의 소설이다. 전혀 새로운 형식과 탁월한 단문들. 내용은 엄청나게 수준이 높아서 숨을 고르기 힘들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으면서도 세상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놓지 않는 인간 김만수. 김만수는 세상과 자신을 둘이 아닌 하나의 것으로써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높은 경지의 삶을 보여주었다.
보이는 세계와 알 수 있는 현상은 너무나 협소하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알 수 있어 위대한 것들은 그것을 있게 한 무수한 것들의 도움을 받고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종종 보이는 것들의 위대함에 빠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시하며 지낸다.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인간은 사실 투명하다.
여기 투명한 한 인간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누구를 있게 하기 위해 자신을 거름이게 한 존재 김만수가 있다.
“각박한 이 세상, 바보같이 아름다운 한 사람이 있었다”라고 이 책은 김만수를 소개한다.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들 속에는 또 다른 이름의 셀 수 없는 김만수가 어김없이 존재한다.
소설가 성석제는 참으로 아름다운 어떤 삶을 알아봤다.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투명인간들의 대단한 경지가 펼쳐지는 세계를.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 가는 희생과 사랑을 김만수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낸다. 소설은 김만수의 삶을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말이란 형식을 통해 객관적으로 알려준다.
성석제는 내 소설은 이야기이며 달콤한 위로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쓰나미는 소설이 세상을 향해 세워 둔 둑을 너무도 쉽게 넘어 들어왔다. 아니, 그 둑이 원래 그렇게 낮고 허술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 이후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2014. 초여름
강장산 아래에서. p370 작가의 말>
그렇다. 너무도 쉽게 현실의 쓰나미는 예고 없이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함께 있다고. 함께 느낀다고. 함께 존재한다고 위안을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쉬울 것이다.
성석제가 발견한 김만수라는 삶의 경지는 그래서 희망이며 위안이다.
나도 가만히 되뇌어본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
오빠, 만수 오빠.
p9
연약하고 다정하다가 극악무도해지기도 하고 그런 채로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나르시시즘과 자기 환멸 사이를 널뛰기하면서 바퀴벌레처럼 강인하게 생존을 이어가는 인간, 인간들. 메시지는 내가 겪어본 그런 인간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따금 내가 짜증을 내고 잡념을 품는 걸 보면 나 역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유치찬란한 장치며 문구에.
→ 그래, 맞아. 그게 인간의 적나라한 속성이지.
연약하고
다정하다가
극악무도해지기도 하고
그런 채로 사랑에 빠지는가하면
나르시시즘과 자기 환멸 사이를 널뛰기하면서
바퀴벌레처럼 강인하게 생존을 이어가는 인간, 인간들.
p11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기 전부터 알았다. 그것도 아주 잘. 속속들이. 머리부터 뱃속, 발끝까지. 뇌리에서 ‘김만수’라는 이름이 야구장 전광판의 1번 타자 이름처럼 번쩍 떠올랐다. 전광판을 장식하는 불꽃이 싸리비처럼 옆에 솟구쳤다가 스러졌다.
나는 알았다. 그 또한 투명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모른다. 그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투명인간이 되었는지를.
→ 여기서 속속들이 머리부터 뱃속, 발끝까지 안다고 하는 것은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김만수를 그렇게 아는 너는 김석수이다. 언젠가 사라져버린 김만수의 친동생 ‘김석수’다.
p100
기타 때문에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으므로 대학 들어와서 맞은 첫 번째 학기말 시험을 엉망진창으로 치렀다. 낙제를 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걱정과 후회, 될 대로 되라는 심정과 사랑과 노래가 결부된 그 느낌은 거부할 수 없이 달콤했다.
→ 강력한 흐름을 누가 거부할 수 있으리.
그래, 될 대로 될 것이다. 뭐든.
하지만 걱정과 후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없을 순 없지.
그래도 사랑과 노래가 결부된 그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이 있어 다행.
나는 시험을 보는 학생처럼 눈을 감고 노래를 불렀다. 그건 내가 좋아한 첫 번째 팝송이었다.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으로 번역된 「All for the love of a girl」, 조니 호턴이 불렀다.
→ 그 팝송 들어봤는데, 곡조가 뭐 그다지.
그래도 의미를 새겨줄 것.
오늘 나는 너무나 피곤하고 우울해요. 슬프고 마음이 아파요. 모두 당신 때문이에요. 지나간 삶은 너무나 달콤했어요. 삶은 하나의 노래였어요. 지금 당신은 떠나가고 나만 남았어요. 나는 어디에나 마음을 맡겨야 할까요. 이 모두 아름다운 소녀의 사랑을 위한 것. 그 사랑은 당신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사랑. 나는 한 소녀와의 사랑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세상의 기쁨을 바칠 수 있는 남자.
→ 지금의 피곤함과 우울, 슬픔과 아픔이 지나간 날이 달콤했음을 일깨운다. 우리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반대측면의 느낌들을 가질 때 깨달을 수 있는 거다. 그전에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일이 삶이 우리에게 주는 양면성이자 축복?
p101
내가 노래에 실은 감정이, 열정이 두려움이 그녀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 제대로 전달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실은 나조차 나를 온전히 전달받지 못한다.
우린 부분에서 전체를 느끼려 애쓰며 살뿐이다.
p163
내가 궁금해 했던 것을 지금 곧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죽을 때 등잔에 기름이 다해 불이 꺼지듯. 방 안의 전등이 꺼져 암흑에 잠기는 것처럼 의식이 스러지면 모든 것이 그만인 것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하리라. 내가 유물론자였음을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내게 입증해 줄 것이다. 자 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 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
→ 나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 때 ‘내가 궁금해 했던 것을 지금 곧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줄곧 그 순간이 몹시도 궁금했으니까. 유물론자의 소멸은 깔끔해서 좋다. 뒤끝하나 남기지 않으니. 하지만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라서 뒤끝작렬일 것이다. 내 삶은 인연 따라 세세생생 불멸할 것이라 믿으니까.
p164
서울은 무식한 내게도 너무도 노골적으로 느껴지도록 ‘물질이 주인인 세상’이었다.
→ 현대과학에 의하면 시공간이 개체들에게 결코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의 시공간은 다른 이들의 시공간에 비해 어떤 때는 빠르고 더디며, 공간의 주인도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서울로의 공간이동만이 이런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은 당혹감 없이는 대면할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다. 노골적인 것은 또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하는지.
p165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공부 같은 거였다.
→ 의식하지 못한 채로 돌아가는 것들은 내공에 기여하지 못한다. 공부란 본시 내공을 기르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내 힘으로 일깨워내는 게 공부의 시작이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내공은 시작된다. 바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p167
없을 무, 없을 무, 없을 무…… 한때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 무, 무, 무, 무, 무. 무슨 주문처럼 ‘무’라는 한 글자가 내 입속에 가득 찼다. 쇠를 끓는 가마솥처럼 입속에서 무의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이제 없는 나의 아버지, 이제 없는 나의 아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 無의 느낌은 참으로 허무虛無하다. 아마도 유물론자들처럼 모조리 ‘無’로 돌려버리면 인생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어디 유물론자들뿐인가. 기독교는 어떻고. 더 어이없지. 이 지상의 세계가 뭐 어때서? 도대체 왜 지상의 벗어나야 할 곳이고 천상으로 가야만 구원이냐고? 진공묘유眞空妙有란 게 있다. 비어있지만 묘하게 있다는 것인데, 이게 참으로 독특하다. 이것을 깨치면 無의 허무虛無함에서 해탈한다. 장담.
p168
복도 창틀에 있는 죄 없는 고무나무에 누가 칼질을 하였다. 고무나무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근거 없는 악랄함에 대해 나는 선생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이런 놈이 있다는 게 수치스럽다. 하지만 나는 교육자다. 왜 그랬는지 동기에 대해 알고 싶고 어떻게 그렇게 마음씨가 비뚤어질 수 있는지 이해를 해보고 싶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다. 누가 그랬나. 나와라. 열 셀 때까지 나오면 용서해 주겠다.
→ 네가 뭔데 용서 하냐?
p237
뭘 쓴다는 것은 살아온 날을 돌이켜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사람에 대한 생각, 감정, 어떤 순간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조금 더 그게 선명하게 보이고 정리되고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 생각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쓰는 것’이다. 사유의 힘은 강력하고, 그 힘을 내 에너지로 쓰고 싶다면 ‘쓰는 것’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이게 다 오영주 때문이다 뼈에 사무치게 고맙다. 만난다면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아 주고 싶다. 그 가슴에는 눈을 마주 보며 심장에 칼을 천천히 박아 넣을 것이다.
→ 와아~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아 주면서 가슴을 찾아 심장에 칼을 박아 넣는 심정은 뭘까. 그것도 눈을 마주보면서 칼을 천천히 박아 넣는.
p240
사실 그럴 때는 내가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성이 아닌 본능만 남아 그들이 하라는 대로 광란하고 울부짖고 길들여지고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다하고, 조종되고 개조되는 짐승이었다.
→ 난 고문 당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비굴해졌던 경험은 갖고 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나의 적나라한 치부보다 다른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었다. 그동안 내가 개무시한 존재들에게 무한한 용서를 빌었다. 나를 인정하고 너를 인정하는 순간과의 대면이었다.
p241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고문을 경험해 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뇌리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불온한 가치관과 불순한 관념이 들어 있는 머릿속의 신경세포를 속속들이 씻어내고 인간성 자체를 개조하는 과정을 겪어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남에 의해 완전히 해체되었다 다시 재조립된 자신을 받아들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
→ 아, 여기에서 말문이 막힌다.
p242
고문을 받으면서 나는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 속까지 그들에게 까발려 보였다. 극한의 고통과 수치감과 두려움, 무력감에 나는 울었다.
→ 나는 과연 극한의 고통과 수치감과 두려움, 무력감에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p244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니었다. 정신분석에서 치료사와 환자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에 가까웠다. 그들은 나의 순진한 사고와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주었다. 세상이 뭔지 알게 해줬다. 가족처럼 너절하고 오래 묵은 것들에 대한 애착,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추억과 과거에서 떨어져나오지 못하고 마른 젖을 빨고 있던 어린아이 같던 나를 현실의 어른으로 만들었다.
→ 그 또한 바람일 뿐이다. 사람은 쉽게 본성을 개조시킬 수가 없다. 절대로.
잠시 바람이 왔다 지나가면 다시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모든 존재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수정당한 뒤 초기화되지는 못한다.
p245~246
사람은 그저 물과 탄소, 전기신호와 미량의 화학물질로 구성된 존재일 뿐이다. 조건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인다. 사고를 하고 판단을 하고 의사소통을 통해 관계를 맺는답시고 시간을 보내지만 모든 것은 정해져 있고 조작될 수 있다.
이제 나는 고향이며 가족처럼 내가 선택하지 않은 족쇄에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우연과 운명, 내가 만들지 않은 신념 따위를 거부한다. 나는 낡고 누추한 새 둥지 같은 과거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다. 내가 선택한 새로운 나, 나의 가족은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환경을 지배할 것이다.
나는 오영주 같은 하찮은 존재에 의해 재수 없게 똥물이 튀긴 채로 살아가지 않겠다. 가족, 공동체, 사회, 국가, 세대, 세상이 망하든 말든 영원히 지속될 씨스템 속에 들어가 씨스템의 일원이 될 것이다. 밥과 권력, 자본이 그런 것이면 거기에 들어가겠다. 계급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내게 유리한 것 나의 평안과 힘과 향상성을 지켜주는 편을 택하겠다. 카오스의 법칙, 엔트로피의 법칙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물리법칙이 되겠다. 씨스템을 훼손하려는 불순한 세력, 끊임없이 준동하는 벌레와 바이러스는 나의 적이다. 그것이 가족이라 하더라도.
나는 오로지 내 길을 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일 것이다. 세상이 모두 망한다 해도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혼자만이라도 끝까지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음으로써 이기리라.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 쓰레기들에 대한 복수일 것이다. 맹세한다. 나는 매일 맹세로 하루를 시작하고 맹세한 뒤 잠이 든다. 꿈에서도 나는 쓴다. 나는 너희 중 누구보다 오래, 드러나지 않으면서 힘을 가진 채로 살 것이다. 살아남음으로써 이기리라.
→ 이해한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 그들과 너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한계는 이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발생한다.
p261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지기(知己)’라고 한다고 들었다.
→ 모르겠다. 죽을 때까지 그놈의 ‘지기(知己)’를 얻을 수 있을지. 나또한 누군가의 ‘지기(知己)’가 될 수 있을 것인지를.
p270
처남이 착하다는 걸 인정한다. 성실하기도 했다.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같이 해야 할 일은 같이 열심히 하겠지만 싸울 일은 싸워서 해결해야 하지 않은가. 또 싸울 때도 상대를 제대로 골라서 싸워야지 제 편, 제 식구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하는 건 나부터 용납할 수 없었다.
→ 상대를 골라서 싸운 다기 보다 마음이 가는 대상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을 하는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
p302~303
내가 무식해서 정치도 모르고 법 같은 건 잘 몰라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 아,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더라고. 할아버지, 형님 같은 가족들, 나중에 사회에서 만난 강철 선배님 같은 분들한테 잘 배워서 그렇지. 노래도 있잖아.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 나는 죽어도 당당하게 서서 고개 들고 웃으며 죽고 싶어.
우리는 대학생 애들처럼 “훌라훌라”를 외치면서 잔을 마주 들어올렸다. 그러면서 용기는 전염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마지막으로 만수형님을 본 것이었다.
→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게 그냥 느껴지는’…… 게 정의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을 거부할 어떤 작용도 내게서 일어나지 않는다.
p324
우리 집 가훈은 말이다. 염치를 알자,란다. 염치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아빠의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가르쳐주었지. 염치라는 건 부끄러움을 아는 거다. 동물들은 부끄러운 걸 모르잖아. 도둑질이나 거짓말처럼 나쁜 짓을 하면 고개를 들 수 없이 부끄럽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반성을 하게 되잖아. 그게 염치를 아는 거야. 아들 생각은 어때?
→ 부끄럽지만 끝내 드러내지 못하고 꽁꽁 숨기고 있는 게 있다. 숨긴 그 범위만큼 내 인생은 그늘져 있다. 밝아져야 환해진다. 드러낼 수 용기가 필요하다.
p325
그래, 나는 오늘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아는 사람들한테 빌린 건 갚아야 하지만 아빠 다니던 회사를 팔아넘긴 은행 같은 데 빚진 건 어쩔 수 없다고.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젠 그 빚도 갚을 거다. 우리 태석이 앞에서 떳떳하게 머리 들고. 나는 빚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죽으라고 일할 거다. 태석이가 아빠한테 큰 가르침을 줬다. 우리 아들이 내 선생님이다.
→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동의한다. 뭔지 모르지만 나를 어둡게 하는 것을 걷어내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한다. 그게 떳떳하게 하고 머리를 들게 한다.
p327
그는 바빠서 잡념이 없고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또 바쁜 틈틈이 오토바이에 달아둔 라디오로 뉴스를 듣고 폐지 수집 과정에서 주운 신문과 잡지를 읽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려고 애쓴다. 그는 술을 마시지도 않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으며 취미생활도 하지 않기 때문에 돈은 쓰지 않는다. 자신의 용돈은 한 달에 만 원 정도다.
→ 잡념이 없고 마음이 편한 경지는 어떤 것인가? 나도 한 달에 용돈 만원만 쓰고 살고 싶다. 귀중한 인생의 순간순간들을 저당 잡히면서 돈을 벌기 위해 헛되게 살고 싶지 않다.
p333
생각하면 카지노도 고마운 곳이다. 쓰레기장이 없으면 쓰레기를 어디다 버리겠는가. 쓰레기인 줄 판별하기까지의 시간을 단축시켜 주기도 하는 것이다.
→ 고마운 곳 맞네. 이런 측면이 있을 줄이야!
p340
나는 너 같은 짐 덩어리를 평생 이고 날라야 하는 당나귀나 종이 아니라고! 사람을 존중할 줄 알라고! 짐승도 저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씻겨주는 은혜를 알아. 당신은 짐승과 뭐가 달라?
→ 짐승이라서 그랬겠어요? 당신이 비빌 언덕이라서 그랬겠지요?
p342
아이는 투명인간이었다. 제가 그런 끔찍한 존재인 줄도 모르는.
→ 견딜 수 없어 자신의 모습을 지워버린 이는 투명인간인가!
p346~347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나는 힘들었고 불행했고 절망적이었고 좋아진 적이 없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 외면의 모습으로 어떤 평가나 동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는 기적이 내게 일어났다는 걸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행복했다. 감미로웠다. 내가 나에 대해 가장 자신있어할 때의 느낌이었다. 그 누군가가 나를 절실하고 뜨겁게 사랑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누구든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못 배길걸, 하는 그런 자신감. 자존감이 생겼다. 좋았다.
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이럴 바에는 나를 죽여주소서. 내 생명을 거두소서. 태우고 잿가루로 만들어 공중에 뿌리소서. 강물이 흘러가게 하소서. 저 광활한 우주의 한낱 티끌이 되게 하소서. 생각하지 않고 제가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원소로 만드소서. 절망 속에서 엎드려 울부짖을 때에 그게 됐다. 또.
→ 잠을 자면 무의식의 세계가 드러난다.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단지 표현할 수 있는 것에 장애가 생겼을 뿐이다.
p352
나는 달려들어서 태석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웃고 있었다. 한없이 예쁘게 웃으면서 그렇게 갔다. 투명해지더니 사라졌다. 아니, 내 몸속에 남았다. 원래는 내 일부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영원히 나의 일부가 되었다. 사랑하는 아들, 내 아들.
→ 어디 장기이식만인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그는 이제부터 영원한 나의 일부가 된다. 비로소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p354
저녁바람이 참 따뜻하구나. 부드럽구나 하고 생각한다.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생명체에게 내려진 축복은 감각이고 감각의 지복은 쾌락이다. 그렇게 설계되었다.
→ 저녁바람은 항상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순간에 존재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은 경이 그 자체다.
p361
사람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믿는 대로 변하지 않는가.
→ 믿는 세계가 곧 나의 우주다.
p362
―투명인간이 되는 건 자연적인 현상일 뿐 이해와 선악이 없다. 그러니 투명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착하고 나쁜 부류로 나뉘어서 싸울 일이 없다. 싸움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군사적으로 투명인간이 실용화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랬다면 아마도 전쟁 자체가 없어져버렸겠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투명인간도 여러 종류다. 신체의 일부만 안 보이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과 같은 경우부터 하루에 한두 시간만 투명인간이 되거나 몇 초만 지속되는 경우, 일 년 삼백육십오일 몸의 모든 부분이 안 보이는 완전한 투명인간도 있다. 일반인이나 자신보다 미개한 단계의 투명인간을 다 볼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다. 당신의 모든 가족이 투명인간이라면 하루 스물 네 시간 서로를 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가족이라도 늘 눈으로 보이는 거리에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 거라는 느낌은 있고 느낌이 잘 맞는다. 살아 있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안다.
―좋은 점이 많다. 몰랐던 걸 많이 알게 됐다. 그전에는 죽은 줄 알았던 사람, 안 보이던 사람도 보이고 나는 내 형님이 혹시 월남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던 건 아닐까 궁금했다. 투명인간이 되고 나서 다른 투명인간들을 만날 때마다 물어봤다. 아직까지는 형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예전에 소식이 끊어진 내 친동생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투명인간이 된 뒤에 그걸 확신할 수 있게 됐다.
→ 어떤 것도 자연스런 현상일 뿐, 그것에 대해 선악은 있을 수 없다.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죽어서도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관계를 통해 존재의 방식을 이해한 이들은 서로를 자신과 차별 없이 사랑하게 된다.
관계를 통한 존재방식으로 보면 모든 것은 죽어있지 않다. 살아 있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를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p364
지금 이 세상이 이렇게라도 굴러가는 것이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 부분과 전체를 꿰뚫어 아는 순간이다. 보이는 것을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자신은 부분이면서 전체다.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는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p363~366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은행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는 투명인간이었다. 사실 돈 모아서 부자 될 게 아니고 남들한테 자랑할 게 아니면 돈 많이 필요 없다. 투명인간이 되면 어차피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에게 옷 자랑, 돈 자랑, 피부 좋다, 자랑할 일이 뭐 있는가. 기본적인 생활만 해결되면 끝이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여전히 사회생활을 하고 대가를 번다.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그게 편하고 사람 사는 노릇을 하고 산다는 기분을 안겨준다.
→ 따지고 보면 결국 기본적인 생활만 해결하면 되는데, 무어 그리 헛된 수고가 많은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한 우리는 모두 투명인간일 수밖에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행복은 성적순으로 매겨지고 부는 상의 일 퍼센트가 독점하며 세습된다. 정격유착, 금권언(金權言)유착, 초국적기업, 신정주의, 광시적 테러가 그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나 혼자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다. 전체속의 부분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이미 부분으로써 전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세계가 신음하고 있는 것은 그런 무책임하고 공상적인 생각 때문이 아닐까. 당신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한다면, 참 오지랖도 넓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지금 세계가 신음하고 있는 것은 너무 책임을 혼자서 지려하고 공상적인 생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아무 것도 아니고 혼자만 위대하다는 착각이 문제다.
―자세한 것 아들에게 물어봐야겠다. 투명인간도 사람이고 투명인간이 되고 난 뒤에도 보통의 사람처럼 해도 되는 일, 안 되는 일의 한계가 있더라. 우리는 천사나 악마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냥 인간이다. 뭔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서로를 알고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한다.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처럼.
→ 천사나 악마 같은 관계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은 한계가 없다. 왜냐? 그건 그냥 말로써만 존재할 뿐이니까.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거나, 사람들은 그런 데서라도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니까 신화와 동화, 인간은 그래서 생겨났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을 이야기로 바꾼 것이다. 이야기는 비록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달콤한 위로가 되어 준다. 그래서 허망한 줄 알면서도 인류는 아직 이야기로부터 젖을 떼지 못했다.
→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할까?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진실이다.
→ 나도 내가 아는 한 진실인 말들만을 하고 싶다. 그러나 경지가 되지 않은 인간은 진실이 뭔지 알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 경험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기도하거나 아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기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 투명인간이 된 사례가 더러 있다.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죽는 게 낫겠다.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새로운 생을 개척해 보자든가 그래서 다리 위에서 투신을 했다든가.
→ 김석수다. 김석수는 철저히 나와 너를 구분하였다. 너가 없는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 없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 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람들, 어머니, 누나들, 나의 아이, 동생들, 나의 아들, 그리고 돌아가신 나의 조부모, 아버지, 형님까지 모두 그렇다.
→ 내 생명의 원천은 나를 숨 쉬게 하는 이들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로 이어져 존재한다. 나는 결코 이 연결선을 끊고서 혼자 뭔가를 포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포기할 수 있다면 세상은 생명은 우주는 참으로 쉽고 단순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의 꽃이 피기 위해서는 물과 공기와 바람과 흙,,,,이 필요하다. 김만수에게 물이 되고자 공기가 되고자,... 그 무엇을 있게 하는 것이 되고자 했다. 아니 이미 그것인 것을 알았다.
―가족, 가족, 가족…… 왜 그렇게 가족에게 집착을 하는가. 혹시 아직 한 인간으로 자립하지 못한 건가? 어릴 때부터 가족지상주의에 세뇌가 되었거나.
→ 나도 이 말에 잠시 동의할 뻔 했다. 그런데 김만수는 그리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지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 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
→ 편재遍在다. 두루 퍼져 있다. 김만수는 이미 편재遍在의 영역으로 갔다.
p367
이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식구들 건강하고 하루하루 나 무사히 일 끝나고 나면 그게 고맙고 행복한 거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가만히 참고 또 기다리다보면 훨씬 나아져요. 세상은 늘 변하거든. 인생의 답은 해피엔딩이 아니지만 말이죠. 난, 난…….
→ 해피엔딩보다 행복한 것은 ‘세상은 늘 변한다는 것’이다.
p368~369
만수가 뒤돌아서 손을 든 순간 무엇인가 달려들어 우리 사이를 차단해버렸다. 유령처럼 예고가 없었다. 순식간에 만수의 몸이 포탄처럼 퉁겨져 다리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콘크리트로 다져놓은 넓은 광장은 강물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다리 위에서 떨어져서 거기에 부딪힌다면 투명인간이든 강철인간이든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떨어진 흔적은 없었다.
문득 물리법칙을 초월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있다면 죽어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인간은 왜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죽지 않는 인간은? 그건 최고 수준에 도달한 투명인간일 것이다.
→ 누구를 온전히 이해한 순간에 대상이던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이미 그와 나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또 오로지 누군가를 꽃 피우기 위해 영양을 공급하던 것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지없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상처에 얼마 동안은 피가 보이지 않듯이 내 가슴에도 한동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쑥, 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자전거에 다시 올라 미칠 듯 페달을 밟았다. 다리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내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김석수가 진심으로 김만수를 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자신을 감쌌던 두꺼운 껍질이 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김만수는 혼자서 떠도는 김석수를 꽃 피게 했다.
형, 만수 형.
→ 김석수도 드디어 사는 게 오히려 쉬운 것이란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그가 김만수이므로.
《투명인간/성석제 장편소설/창비/2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