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성(오쇼)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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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19 바람 526

Q.
라즈니쉬, 저는 한국의 한 승려로부터 한 여인의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성을 원하여 찾아오는 모든 남성에게 성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뺨은 항상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를 깊이 감동시켰고 항상 저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눈물에 대하여 당신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부디 설명해 주십시오.

A.
이 이야기는 아주 짧은 것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 별 대단한 것이라곤 없지만 그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다.

"성을 원해서 찾아오는 모든 남성에게 사랑을 베푼 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두 뺨은 언제나 눈물로 젖어 있었다."

비록 단순한 문장으로 된 짧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모든 인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사랑이 가능한데도 성을 결코 초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두 뺨은 항상 눈물로 촉촉히 적어 있는 것이다. 눈물로 가득 찬 그대의 두 눈을 나는 볼 수 있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그 눈물을...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성적인 차원에서 머문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결코 그 사랑의 순간에 도달해 보지 못한 채로...

사랑은 성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사랑은 성이 아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태어나나 연꽃은 진흙이 아니다. 그 진흙이 진흙인 채로 남아 있다면 뺨의 눈물은 언제나 흘러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대는 진흙 속에서 연꽃으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대는 더 높은 공간에서 개화되기를 기다리지만 아직 그렇게 뿌리에만 머물고 있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사정은 이러했다. 사랑에 도달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을 보고 그대는 미소 짓는다.

그들 속에서 내려오는 은총과 아름다움, 그것들에 그대는 미소 짓는 것이다. 사랑은 변형시킨다. 성은 기껏해야 이완시킬 뿐이다. 물론 성은 건강에 좋고 위생에 좋다. 나는 결코 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성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알파벳이다. 사랑이라는 시는 성으로부터 창조되어야 한다. 모든 시는 축소시키면 알파벳이 된다.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고 싶다.

마크 트웨인의 친구 중 훌륭한 목사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 마크 트웨인을 초대했다. 그 친구는 수년에 걸쳐 그를 초대해 왔었지만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은 '그래, 가마.' 하고 쾌히 승낙하였다.

목사는 열심히 설교를 준비했다. 이제껏 하던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훌륭한 설교를 베풀었다. 물론 그는 위대한 목사였으니까 수천 명의 사람들은 깊은 황홀 속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설교가 절정에 이르자 청중은 마치 주문에 홀린 듯 혼을 놓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듯한 짙은 침묵이 흘렀다. 목사는 몇 번이고 곁눈질로 마크 트웨인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주 지루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설교가 끝나고 둘이 같이 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목사는 물어 볼 용기마저 잃어 버리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마크 트웨인의 집에 이르러 그가 차에서 내리려 할 때에야 목사가 겨우 물었다.

"설교가 어떻던가? 자네 마음에 들던가?"

마크 트웨인은 대답하였다.

"모두 난센스야. 모두 빌려온 것들이었지. 요즈음 마침 책을 읽고 있는데 당신이 한 말 모두가 다 그 안에 적혀 있더군." 목사는 당황하였다. 그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아마도 여기저기에 비슷한 문장쯤이야 몇 개 있었겠지만 설마 전부를 다 빌릴 수가..."

마크 트웨인은 대답한다.

"단어 하나 하나를 모두 복사했더군. 그것은 완전히 도둑질이지."목사는 어이가 없어 자기도 그 책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였다. 다음날 마크 트웨인은 그 책을 그에게 보냈다. 그것은 사전이었다. 물론 그 사전 안에는 그가 한 말 모두가 다 들어 있었다.

이렇게 모든 시는 알파벳으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시는 알파벳이 아니다. 붓다의 모든 설법도 알파벳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설법은 알파벳이 아니다. 프로이트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사랑을 성으로 축소시켰다.성은 단지 사랑의 알파벳일 뿐이다. 타지마할은 단순한 석재만은 아니다. 석재만을 쌓아 놓는다고 하여 그것이 타지마할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타지마할은 무한한 사랑, 무한한 창조성의 예술작품인 것이다. 성(性)은 석재와 같다. 성을 쌓기만 하면 그녀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인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닌 여인이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으나 결코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의 대상으로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여인이 지나간다. 그대들은 그 지나가는 여인을 한 존재로서 본 적이 있는가? 단지 여자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지고, 한 존재로서가 아닌 하나의 성의 대상으로 그녀를 본다. 때로는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성적인 관점에서이다. 성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서 그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전에는 그대의 볼은 늘 눈물에 젖으리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본다. 여자를 보는 남자, 남자를 보는 여자, 그들은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른 무엇을 찾는다. 그들은 음식을 찾는 중이다. 그들은 식욕에 동하고 있는. 성이라고 하는 식욕에 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대상으로 누군가가 그대를 바라볼 때 그대의 기분은 상한다. 그 순간 그대의
자기동일성은 진흙의 상태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사랑은 누구를, 무엇을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다. 축소시키지 않고서 사랑은 가능하다. 아니, 결코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일상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랑은 높이 비상하게 하고 사람을 명상적으로 만들고 황홀경으로 데리고 간다. 사랑은 우리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신이 존재하며 보다 높은 세계가 있다는 것의 첫 증거이다. 그 여인은 이것을 동경한 것이다. 그녀는 많은 사람을 사랑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영혼 속을 들여다보면 그때마다 그 속엔 성에 대한 욕망이 있을 뿐이었다.

많은 여인들이 나에게 찾아와 울면서 고백하곤 한다. 그들이 남편과 성관계를 맺고 나면 남편은 바로 쓰러져 잠들어 버린다고 했다. 그들의 성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잠 재우는 수면제와 같은 구실을 할 뿐이다. 여자는 계속 울게 되리라. 그녀는 플라스틱 제품처럼 필요할 때 쓰인 후 쓰레기처럼
내버려진다. 남편들의 욕구는 충족되었고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만 남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추하다. 인간 자체의 그 아름다움, 위대함, 신성함으로 타인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말하고 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신이다. 타인을 신으로 볼 때 타인은 충족된다. 바로 그 쳐다보는 시선은 우아해지고 신비로워진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표현을 한다. 어리석은 얘기다. 왜 사랑에 빠져 버리는가? 왜 사랑 속으로 높이 떠오르지 않는가? 사랑에 빠져 버렸다는 말은 속임수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우리는 사랑에 빠지기를 원한다. 더 낮은 곳으로 빠져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한 예가 있다.

새 조산실이 열린 지 6개월 동안 500명의 아기가 탄생되었다. 그런데 아기는 전부 여자였다. 7개월째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한 명의 사내아이가 태어났다.조산원들은 이 이례적인 경사를 축하하기 위하여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한참 무르익어 가는 도중에 신문기자가 한 명 도착했다. 그는 그 사내아기가 엄마를
닮았는지, 아니면 아빠를 닮았는지 물었다. 조산원 중의 하나가 대답한다.

"몰라요, 우린 그 애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어요."

6개월간 여자아이만 탄생하다 7개월째 남자아이 하나가 태어났는데 누가 그 아이의 얼굴에 신경을 쓰느냐는 것이다.

성적 본능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대를 바라보는 것은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성기를 보는 것이다. 그는 그대를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그대를 성기로 축소시켰을 뿐이다. 나는 당신에게 흥미가 없고 오직 성기에만 흥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은 깊은 사랑을 지닌 여인이다. 그대,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면 언제나 그대의 볼은 눈물에 젖어 있으리라. 왜냐하면 그대의 그 깊은 사랑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저속한 욕구를 채우기는 쉽다. 사람들이 저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고상한 욕구를 품고 있다면 상대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높은 욕망을 가진 그대는 늘 고독할 것이다. 그것은 여자에게 자주 오는 문제이다. 이해심을 가진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이나 성으로 축소시킨다. 이 두 가지만이 진짜 신(神)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돈 아니면 성이다. 사람들은 또한 성을 위해 돈을 추구한다. 성은 돈으로 쉽게 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유태인이 사창가로 갔다. 그는 마담에게 가장 싼 창녀를 원한다고 부탁했다. 마담은 대답했다.

"10달러짜리 흑인 여자가 하나 있는데요."

그는 말했다.

"나에게는 4달러밖에 없소."

한참 옥신각신 끝에 창녀 대신 마담이 직접 4달러만 받고 잠자리를 같이해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유태인은 다시 그 사창가로 찾아 갔다. 마침 마담이 나왔다. 마담은 유태인에게 10년 전의 관계로 지금 아홉 살 난 애가 하나 생겼다고 말했다. 그녀는 애를 불러 아빠가 왔으니 인사하라고 했다. 그 애는

'당신이 바로 우리 아빠라는 사람이군요. 당신 이름이 뭐죠? 오늘까지 나는 우리 아버지 이름이 늘 궁금했어요. 예? 골드버그라구요? 제길,그러면 내가 유태인이란 말에요?' 하며 불쾌한 듯 소리질렀다.

유태인이 대답했다.

"얘, 투정부릴 것 없다. 만약 10년 전에 나한테 6달러만 더 있었더라도 너는 게다가 흑인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모든 일이 돈 아니면 성으로 취급된다. 삶의 성스러움은 깊은 곳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사랑을 열망하는 가슴을 가진 자, 그들은 결코 충족하지 못한 채, 연민의 눈물로 가득 찰 것이다.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보라. 성은 오직 부분이고 시작일 뿐이다.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추하게 되고 만다. 성이 사랑의 그림자처럼 된다면 성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유혹에 지나지 않고 성이 목적이라면 그때 성은 추하다. 그대의 온 존재는 점차 추해지고 드디어 그대의 존재는 바람과 같을 것이다. 결코 누구를 성의 대상으로 보지 말라. 누구든 그대의 성의 대상으로 축소시키도록 허용하지 말라. 성이 사랑을 따른다면, 성이 사랑과 화음을 이룬다면 그때 그것은 더 이상 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것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그대의 마음을, 그대의 몸을, 그대의 영혼을,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이다. 그대가 심미안을 가졌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대의 시를, 그대의 그림을, 그대의 환영을, 그대의 꿈을 준다. 그리고 그대의 성을 줄 것이다. 그때 그것은 아름답다. 그렇게 아름다운 성은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높이높이 날게 될 것이고 감사한 마음이 함께 할 것이다. 존재 속에서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 그 성을 기도처럼 간직하라. 그것은 신성을 향하는 문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