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를 보다9

03-08-06 지구인 1,445
실화다.

오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할 일이 있었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나름대로 절박함 속에서 했어야 했다고 믿었던 행동이 결과적으로 역효과를 낸 것이다.
이전에도 그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에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습관적으로 반복되지나 않을까 하는 상당한 자괴감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런 나 자신도 미처 알아차리기 어려운 태생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면, 그런 판단력의 미숙을 안고 있다면, 그런 운명적 능선의 소유자라면 이건 내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두려워 해왔던 캐릭터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읍참마속, 마속같은 존재 말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세를 그르치고 나와 함께 하는 동지들의 운명마저 원치 않은 비극으로 끝맺게 하는.
차라리 이럴진대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한여름낮의 햇살을 그대로 받으며 이리저리 헤매이고 있는데 문득 보도블록위에 한마리 지렁이가 눈에 띄었다.
제법 작지 않은 지렁이는 아주 힙겹게 그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놓여있는 공간은 그런 실낱같은 바램마저도 애시당초 용납치 않는 광활한 콘크리트 사막이었다.
그는 머지않아 한줄기 바짝마른 유기질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또 하나의 애처로운 숙명을 보면서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웬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결국 몇발자국 지나쳤던 길을 되돌아와서 잠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다행히 그 길은 외곽지역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 내 행동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보도블록 바로 옆으로는 그 지렁이가 염원해 마지 않을 흙세상, 화단이 있었다.
그러나 지렁이는 전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감지 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헛된 방황만 할 뿐이었다.
그 순간에 있어서 지렁이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오로지 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다.
어차피 도시화된 주변 생태계에서 지렁이를 살려준들 얼마나 생명을 부지할 것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구해주려고 할 때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채 펼쳐보일 필사의 방어초식, 그 처절한 길다란 연체동물의 몸부림이 너무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직접 손으로 집지 않더라도 내게로 전달되어올 그 소리없는 전율 말이다.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도전 1편 상제님의 어린 시절이었다.
호생의 덕이 많아 생물을 살리기에 힘썼다는.
상제님이라고 그 행위의 궁극적인 부질없음을 모를 리가 있었겠는가.
아무튼 난 생사판단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렁이 곁에는 마치 그를 들어올리는데 쓰라는 듯, 마른 풀잎줄기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조금은 연약해 보이는 것이 여전히 회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로 지렁이를 들려면 아무래도 내 손에 보다 가깝게 지렁이를 얹어야 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난 지렁이를 구제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난 마른 풀잎을 반으로 접어 보다 튼튼하게 만든 다음 조심스럽게 지렁이를 들어올렸다.
아니 화단쪽으로 퍼올리듯 했다.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지렁이는 예의 몸부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뜨거운 열기에 탈진상태의 지렁이의 몸짓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견딜만 했다.

기어코 지렁이를 화단에 던져 넣는데 성공했다.
그다지 개운치 않은, 의무감의 억지스런 해소에 불과한 안도감은 그러나.. 더 큰 자괴감으로 다가왔다.

지렁이가 떨어진 바로 옆이 개미집이었던 것이다.

................
..........
......
.. 그의 주위로 사명감에 찬 몇마리의 일개미들이 분주히 다니고 있었다.

결국 그게 내 운명의 능선이었던 것이다.
위해준다고 하지만 오히려 더 큰 곤경에 빠뜨리는..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 자신의 태생적 한계.

뜨거운 보도블록 위에서 말라죽는 것과 산 채로 작은 포식자떼에 압살당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난 지렁이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준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지렁이의 운명에 개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단 안에는 개미들이 널려 있었다.
또 지렁이가 파고들만한 부드러운 지반도 보이질 않았고 난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 물이라도 떠와서 지렁이의 주변 흙에 뿌려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고 주위는 그럴만한 여건도 아니었다.

내 머릿속엔 잠시 후 그가 개미떼로 뒤덮인 채 마지막 몸짓을 하게 되는 영상이 떠올랐다.
그건 나 자신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 줄 것이며 운명이 내게 선고하는 냉엄한 형량의 재확인이 될 것이다.

지렁이는 여전히 각박한 지반위를 나름대로 힘겨워 하며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몇몇 개미들은 이미 그의 살냄새를 맡았다.
그의 앞머리는 지반이 약간 움푹한 곳에 아주 조금 쌓여있는 나뭇잎을 파고들고 있다.
개미 두어 마리가 그의 뒷몸통 부분을 접촉했고 그는 반사적인 전율을 하며 그들을 떨어내었다.
개미구멍 주위로 열마리 채 안되는 개미들에게 점차 흥분의 파장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지렁이의 앞머리 부분이 대부분 나뭇잎 밑으로 들어갔다.
개미들은 아까보단 조금 더 분주한 걸음들이지만 웬지 희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낮이라 개미들도 본격적인 사냥시간은 아직 안된 것인지.

지렁이의 몸통 반이 나뭇잎 밑으로 들어갔다.
나뭇잎에 가려져 있던 지반은 비교적 습기가 있어서 그가 파고들 수 있을 정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 기대는 현실화 된 것 같았다.
지렁이의 몸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진정한 안도감을 느끼며 손에 들고 있던 마른 풀잎을 놓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지렁이가 그 화단에서 얼마나 더 생존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더 이상 내 소관이 아니었다.
지렁이도 그것만큼은 인정해 줄 것이다.
적어도 지렁이에게 한 내 행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아직은 나는 나를 신뢰해도 좋은 것이다.
지렁이가 날 구했다.
  • 03-08-06 如原
    읍참마속, 마속같은 존재 말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대세를 그르치고 나와 함께 하는 동지들의 운명마저 원치 않은 비극으로 끝맺게 하는.
    차라리 이럴진대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생각도 드는 것이다.(병철)

    아주 난해한 순간에 봉착했었군요.^^
    그 순간과 함께한 지렁이에게 감사드리고 싶군요.^^
  • 03-08-06 바람
    저로서는 따뜻한 님의 마음이 느껴져 좋습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그 지렁이를 혹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도와준다라고 하는 마음이 일지를 않을 것 같습니다. 지렁이가 불쌍해서 그러한 자비심을 일으켜 그러한 행위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님이 하였다기 보다는, 님속에 잠재되여 있는 본성에 님이 따른 것이므로, 님의 본성에 따라 님은 잠시 도구(방편)으로 쓰여졌다 이렇게 봅니다. 따라서 도와준 행위는 있으되, 그것을 내가 '하였다'라고 분별을 일으키는 자(者)가 발생하지 않기에, 나는 그러한 행위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물론 지렁이가 잘못되어 개미들에게 잡혀 먹는다면,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하고, 마음아파할 수는 있겠지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저로서도 마음이 좀 아플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내가 그것을 하였다고 하는, 다시 말하여 행위와 나를 연관시키는 그러한 것이 발생하지 않음으로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섬세한 주의와 정성은 기울일 수 있으되, 그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는 나를
    연관시키지 말고, 자연의 섭리에 맡기자.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나의 행위보다 더 인정하여 주자' 이러한 생각인 것이지요.
  • 03-08-08 웃음
    지난번에 TV에서 현각스님의 설법이 있었는데
    어눌한 한국말로 어떻게 설할까..호기심에서 채널을 고정시켰는데
    측은지심에 대한 설명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꼬마가 길을 가다 넘어졌을 때, 그것을 보게된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어머머머...."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이라 하던,
    그렇담 사람 누구에게나 흔해빠진 그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었지요.

    제가 만약 그 순간의 지구인님이라면 지렁이를 구해준 거기까지만 생각하겠습니다.
    꼬마가 엎어져서 어머머머 하고 달려가 얼른 일으켜 세웠는데
    일어난 녀석이 뒤로 자빠져 죽어버렸다해도 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죽은 꼬마녀석이 제 마음을 알아줄거라고 그냥 믿고서....

    어쨌든 위와 같은 지구인님을 구한 지렁이가 저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설령 지렁이가 개미밥이 되었더라도
    나의(지구인님) 최선을 지렁이도 알거야. 이렇게 생각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저는 해뿔랍니다.^^
  • 03-08-09 지구인
    두분.. 말씀은 고맙지만 여전히 관념속에만 계시네요. 개미밥이 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지렁이는 나의 최선을 알아준다..? 마치 고통이 뭔지 모르시는 분 같습니다. 고통이란 걸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십니다. 마침 오늘 본 서평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구나무 선 동화같은 이 단편은 회의없는 선의와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절묘하게 비판하고 있다.

    [문학의 숲] 숨어있는 신의 침묵

    표제부터 매혹적인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에는 16편의 단편이 보인다. 주옥같은 작품이라는 옛투의 수사학이 딱 어울리는 이 책에선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남태평양 외딴섬의 토인이 유럽인을 등치는 사례를 통해 상업주의의 세계 제패를 보여주는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영웅적 행위에 대해서’의 기발한 착상과 경묘한 주제 처리를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초현실적인 사건전개가 희극적이면서도 섬뜩한 현실감으로 다가오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어떻게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노예가 된 인간은 노예 근성을 기르기 마련이라는 심리적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근접한 집단적 정치 치매증을 돌아보게 한다. 유태인을 다룬 또 하나의 단편 ‘어떤 휴머니스트’도 통렬한 작품이다.

    히틀러가 부상할 무렵 뮌헨에 살고 있던 완구 공장 사장인 유태인 칼 뢰비는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믿는 낙관론자다. 이민 가자는 유태인들의 충고를 마다하고 여차하면 1차대전 때의 전우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 장담한다. 사태가 악화되어 소유 공장 접근 금지의 통고를 받자 그도 불안해졌다.

    여기저기 옛 전우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서재로 들어가 벽을 메운 책들을 바라보았다. 플라톤, 몽테뉴, 에라스무스, 테카르트, 하이네 등 등. 이들은 하나같이 인간 편에 서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뢰비씨에게 일렀다. 관용과 정의와 이성은 승리할 것이며 시간이 좀 걸릴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에겐 15년간 일해온 충직한 하인 부부가 있었다. 여자는 가정부, 남편 슈츠는 운전사와 집사의 역할을 했다. 슈츠는 일과후 주인이 빌려준 책을 읽었고 괴테, 실러등을 좋아했다. 주인은 가끔 슈츠를 불러 신의 존재, 휴머니즘, 자유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뢰비씨는 지하실을 은신처로 삼고 음식은 슈츠부인이 나르도록 조처했다. 재산 몰수를 피해 공장과 집을 슈츠 부부에게 매매한 것 처럼 서류를 꾸미고 은신처에서 칩거한 그는 기가 죽는다는 이유로 신문읽기도 거부하고 슈츠가 전하는 정보에만 의존했다.

    독일 항복 후 귀국한 친구가 찾아왔지만 뢰비씨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얘기만 듣게 된다. 히틀러의 영국 점령 소식은 충격이었으나 뢰비씨는 낙망하지 않고 슈츠를 위로했다. 칩거생활로 건강이 악화됐지만 하인 부부의 극진한 봉사를 받으며 자기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행복하게 죽을 것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물구나무 선 동화같은 이 단편은 회의없는 선의와 감상적인 휴머니즘을 절묘하게 비판하고 있다. 뢰비씨의 인간 신뢰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이라기보다 플라톤, 몽테뉴, 에라스무스, 테카르트 등을 통해서 학습한 것이다. 죽음의 유태인 수용소 관리자가 괴테와 릴케와 고전음악의 애호가이며 가족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남겨놓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인문주의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는 견해에 우리는 아주 익숙하다.

    야만적 정치 권력과 교양적 인문주의 사이에서 실질적 공모(共謀)관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뢰비씨의 행방을 모른다고 거짓 대답하는 슈츠의 손에 괴테가 들려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끝자락은 ‘어떤 휴머니스트’와 뻐근한 대조가 된다. 거지꼴을 한 스필만이 쇼팽의 야상곡을 끝내자 독일군 장교는 긴 한숨을 내쉰다. 파괴의 공간에서 울리는 음악에 대한 감동인가? 인간도 문명도 깡그리 깨부수는 전쟁에 대한 절망감인가?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대한 회한 탓인가? 모두 들어있겠지만 장교의 스필만 구조는 기막히게 고맙고 아름답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선동 정치인의 표리 부동한 큰 목소리가 아니라 조그만대로 이러한 인간의 선의일 것이다.

    독일군 장교의 뒷얘기가 궁금해서 대본이 된 스필만의 회고록을 구해 보았다. 스필만 말고도 구해준 사람들이 더 있었다. 1949년에야 호젠펠트 대위란 신원을 확인한 스필만은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소련 동무들’의 관장아래 있어 손을 쓸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대위는 52년에 스탈린그라드의 포로수용소에서 참사(慘死)한다. 유태인을 구해주었다고 말했다가 턱없는 거짓말이라고 도리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하늘과 땅의 정의는 어찌 되는가? 숨어있는 신은 오직 침묵할 따름이다.

    (유종호·문학평론가·연세대특임교수)
  • 03-08-10 원정
    아!!!
    살았다!

    이상은 지렁이의 "마지막 잎새" 편이었습니다.

  • 03-08-10 모모
    전, 사람들에게, 가끔, '사주,관상,손금, '등을 봐 줄때가 있습니다.
    하나만 가지고서 잘 알수 없기에, 그 세개를 가지고 잘 살펴서, 이야기를 해 주죠.
    (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오늘의 마음이 내일을 만든다...로 끝맺게 됩니다..^^)
    또는, 목이나 어깨 다리가 아픈 사람들을, 지압해 줄때도 있지요..
    하지만, 모두 그런건 아닙니다.
    그때 그때, 그러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면 그리해 줍니다.
    지구인님처럼, 지렁이가 죽을 지경이라 살려주려고 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잠시 가던 발길을 늦추고, 그리해 줄수도 있지요.
    그리고, 전 그런 행동이나 마음에 대해, "인연이 닿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꼭, 제 행동이나, 마음에 대해 유치하게 생각한다거나, 대단하게 생각한다던가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 모두의 사주를 봐줄 저도 아니고, (귀찮거든요. 일부러 봐달라 하면요.)
    또는, 귀찮은 일을, 억지로 하는 저도 아니구요...^^
    그리고, 누가 어깨를 주물러 달라거나, 아픈 부위를 봐달라고, 해서 쉽게 봐주는 저도 아니고, 죽을거 같은 생물 모두에 관대한 저도 아니구요.
    단지,,,,
    그 상황, 그 시간대에서, 만난 인연에 대해, 제 마음과 몸이 좀더 여유로운 상태에서
    대면했을때,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해줄수는 있지요.
    그래서,
    상대가 좋아하고 감사할땐,,,,,,인연이 된거겠지.......하고 말한답니다..
    그리고, 실지 그리 생각들구요.
    전,,,,,
    웬지, 지구인님의 마음을 알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찌 알겠나....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알거 같습니다.^^*
  • 03-08-10 지구인
    ㅎㅎ.. 제가 가끔은 의도적으로 칼바람(칼부림 아님--;)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안으론 그걸로 상황끝입니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요. 오행기운 고루 갖춘 무공해 야채들과 소금구이(였던가..?)의 저녁식사^^ 저 원래 이런 인간입니다. 이해해주십셔ㅠㅠ
  • 03-08-10 바람
    똑같은 것을 보고도 그 고통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틀림니다. 아주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삶의 방식이므로 어떻게 살든 그 사람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러한 고통을
    느낄때 그것이 너무 자기자신에 대한 자학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애기인 것이지요.
    그래도 나는 이렇게 진정한 고통을 느껴보아야 뭔가가 더 진실한 것 같다고 한다면 그것도 본인의 자유이겠지요. 단, 그것으로 인하여 나의 행위는 보다 진실한 것이고, 그렇게 않은 사람은 보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좀 달리
    생각하여야 할 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 03-08-10 웃음
    제가 직장 다닐 때 저희 은행 건물 바로 뒤에 보신탕 집이 있었는데
    여름만 되면 날이면 날마다 개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었습니다.
    처음엔 그게 개 잡는 소린 줄 몰랐었는데 보통 개 짖는 소리랑은 많이 다르더군요.
    점심을 먹고 잠시 쉬려고 여직원 갱의실에 있으면 그 개들의 소리가 어찌나 괴롭게 들리던지
    점심먹고 휴식 시간에 갱의실에서 그 소릴 들으며 앉자 있는건 참 고역이었습니다.
    소고기도 먹고, 돼지고기도 먹고, 음식이라면 동식물을 안가리고 먹으면서도
    쇠망치로 맞아죽는 개의 울부짖는 소리를 바로 듣는건 참 괴로운 일이었었지요.
    그렇다고 내가 개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무슨 도리가 있는것도 아니고,,,,,
    개 울음 소리가 하도 듣기 괴로워서 이런 말만 했습니다.

    "이 담에 너희세상이 오면 너희도 우리 인간들을 보신탕으로 한번 만들어 먹어라
    꼭 그래라.
    난 한번도 너희들을 괴롭힌 적은 없지만 내가 먹혀야 될 차례가 된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너희들처럼 괴로움을 당하며 죽어줄께, 그래야 안되겠나..."
    그리고 정말 그런 세상이 한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심입니다.

    지구인님 말씀처럼 '고통을 안일하게 생각한다.' 고 생각하시면 할 말 없지요 뭐.
    전 고통을 안일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면 쓸데없는 말 길어질것 같고..

    지구인님이 뭔 말 하시고 싶은건지 모모님말씀처럼 저도 그냥 안다고 말할래요.^^

    칼바람이든 칼부림이든 자주 일으켜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을 좀 쳐 주십시오.
    그럴려면 칼춤을 추셔야겠네요.^^
    죽여주세요, 제 관념을.(진심입니다.)
    그리고 제가 죽는 만큼 지구인님도 죽여보고 싶습니다. 지구인님 관념도.
    근데 이건 안되겠죠
    전 살리는것에만 능력이 있기를 소원하며 살았으니 죽이는 건 잘 안될거 같은 불길한 느낌이....한번 덤벼보지도 않고 꼬리 내리는 비겁한 웃음^^ 용서하세용. 전 이런 인간 입니다.^^
    지구인님이 원래 어떤 분인진 잘 몰라도
    전 지구인님이 참 아름다운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죠
    아름다운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안이라도 단락단락으로 상황끝이어야죠. 무슨 감정이 있겠어요, 그럼 그건 진짜
    피곤한 일이지요.

    한번 더 부탁드릴께요. 의도적인 칼바람, 자주 일으켜주세요. 또 말합니다, 진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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