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천에서 만납시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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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2 바람 575

도솔천에서 만납시다중 '명자(名字)'

우리의 몸은 비유하자면 나무의 아파리와 같습니다. 명자는 참 무서운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거짓이지만 말마디(言句)는 참입니다.

온누리에 벌어진 일체만법이 각각 모습이 다른 실답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하는데, 그 실답지 않은 것의 뿌리는 하나의 허공입니다. 이 때문에 '허공은 하나이니 진리는 하나고 진리가 하나니 목숨도 하나'라는 겁니다. 나무도 허공성이고 땅도 허공성이니 진짜 나무는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것이 진짜 땅입니다. 이건 물론 이적(理的)인 말입니다. 사적(事的)으로 보면 나무와 땅이 있죠. 그러나 이적으로 보면 나무라 하는 것이 허공성인 나무이기 때문에 나무는 하나의 헛것인 명자(名字)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중생은 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이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사적으로는 중생이지만 이적으로는 중생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땅도 명자놀이고 나무도 명자놀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치우치면 안됩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인정하고 땅은 땅대로 인정하면서 이것이 허공성이며, 허공성에서 나툰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일체만법이 이루어진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인정을 하면서도 이 일체만법이 항상 변화하는, 실답지 않은 허공성으로서 인생살이의 놀음놀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무는 나무대로 인정하면서도 나무가 아니고, 땅은 땅대로 인정하면서도 따이 아니라서 전부 나의 놀음놀이에 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명자에 들어않아서느 안됩니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가 풀려나가는 요점이 이 도리에 있습니다.
이 명자가 실답지 않으니 부처님의 32상 80종호도 실답지 않은 겁니다. 32상 80종호는 부처님이 몸을 굴리는 데서 나타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32상 80종호를 걷어잡지 못하면 부처님을 영원히 걷어잡을 수가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 몸뚱이도 헛것입니다. 변하기때문에 자체성이 없는 헛것이에요. 결국 이 몸뚱이가 가는 곳이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니 어찌 이걸 진짜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가짜를 걷어잡지 못하면 진짜인 법신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니 가짜로 보되 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소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불송에다 '네 가지 나의 소임'이라고 써놓은 것입니다.

나의 색신은 모두 부처의 위의(威儀)를 들내는 대행기관입니다.
나의 색신은 모든 부처의 슬기를 세우는 대행기관입니다.
나의 색신은 모든 부처의 솜씨를 굴리는 대행기관입니다.
나의 색신은 모든 부처의 자비를 베푸는 대행기관입니다.

이처럼 우리 색신은 모든 부처의 대행기관입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이라고 하지만 모든 부처가 자비심을 갖추고 있어요. 그러나 이 자비심을 대표한 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럼 이 자비심을 누가 행하는 건가요? 여러분이 행하는 겁니다. 진짜 부처님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소식이거든요. 이 보살의 자비심을 여러분이 이 색신, 이 가죽주머니를 통해서 대행하는 겁니다. 모든 부처의 지혜를 대표하는 것이 문수보살의 지혜인데, 이 지혜를 쓰는 것은 여러분이 쓰는 겁니다. 이렇게만 되면 여러분은 이 색신 그대로 부처가 됩니다. 그래서 처음 공부를 할 때는 가죽주머니라고 하면서 이 모습을 무수기 위해 온갖 애를 쓰지만, 되돌아서 이 가죽주머니를 인연이 있을 때까지 쓰면서 하나의 소중한 법기(法器)로 여기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 가죽주머니에 들어앉기만 해서 때려부수라고 하지만, 이 도리를 알면 되돌아서 소중하게 생각 하는 겁니다. 그러나 소중하게 생각할지언정 이 색신을 진짜라고 보아선 안됩니다. 법신에 앉아서 변화하는 색신을 굴릴지언정 들어앉아서는 안되니, 들어 앉으면 꼭두각시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 도리를 알면 고불(古佛)을 친견하는 도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이거는 좀 어려워요. 그러니 항상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죽 나가면 부처를 친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