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의 인도 여행0

03-07-28 원정 927
「헤르만 헤세의 인도여행」중에서 발췌한 글
- 이인웅·백인옥 옮김, 푸른숲, 2000 -



■역자서문

영혼의 본향(本鄕)을 찾아가는 방랑자 헤세



「그뿐만 아니라 헤세의 문학과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싯다르타》, 《동방순례》,《유리알 유희》 등의 작품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동양과 서양, 자연과 정신, 신과 악마, 선과 악, 남자와 여자, 《성경》과 《불경》등 무수한 대립적 개념이 순간적인 양극에서 벗어나 얼마나 조화롭게 어울리며 서로를 보완해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양극적 전일성(全一性)'이라는 헤세의 우주주의적 지혜와 이상을 예감할 수 있으리라.」



콜롬보를 앞에 두고 -헤르만 헤세- (p.189-190)



「낮의 뜨거움이 푸른빛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파도가 치는데도 배는 흔들림 없이 가고 선다.

이처럼 고요하게 한결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부딪히고 깨어지는 밤에도 이처럼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것이

내 여행의 목표였다. 하나 난 그걸 배우지 못했다.

이제 난 고향을 바라보며 기다리나니,

새로 올 날들의 다양함에 대비하면서,

생활의 잔혹함에 호기심을 가지고서,



나의 속성은 고요가 아니며, 혹성의 궤도 또한 아니다.

난 파도이고, 흔들리는 조각배다.

폭풍우 일 때마다 온몸이 흔들리고

작은 입김에도 상처받고 마음이 동요된다.

그래서 아주 먼 회귀선까지 나가보지만

결국 발견하는 건 나 자신일 뿐, 온갖 방랑욕에 휩싸인

여행길에서 다시 돌아온다.

삶의 고통과 쾌락을 열망하며,

새로운 변화와 싸움을 준비하며,

모험에 대한 욕망은 그대로 둔 채 빠져나온다.

나는 대지의 아들이지, 별의 아들이 아니다.

나의 감각은 불안정하다. 바람에 동요되고,

바다에 흔들리고, 폭풍이 날 깨운다.

빛으로 위로를 받으며 밤의 어두움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삶의 충동 속에서 수백 번씩

지혜를 갈구했든 혹은 평화를 갈망했든,

언제나 이 세상 일들에 얽매인 채

점점 더 내 어머니를 닮아가는 것이 내 운명.」





아시아에 대한 추억 (p.509-514)



「말레이 군도를 여행하고 나서 3년이 지난 지금 회상해 보니, 그때 본 하나하나의 모습들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고 가볍게 흐려져서 완전히 보편화된다.」



「말라카 반도와 수마트라섬들의 도시와 숲속에서 지낸 몇 주일간의 여행에서는, 거기서 본 수백 가지의 세세한 것들이 함께 뒤섞여 다음가 같은 인상을 남겼다. 그 첫 번째이면서도 어쩌면 가장 강한 외면적 인상을 준 것은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대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종족이나 신앙, 영혼적 유사성이나 삶의 이상에 대한 동질성을 통해 어떻게 하나의 몸체로 합쳐지는지, 나는 아직까지 그런 것을 실제로 체험해보지 못했다. 그러한 몸체의 개개인이란 꿀벌 나라에서 각각의 꿀벌이 그러하듯이 그저 조건부적으로 하나의 세포로서 공존할 뿐이다.」



「나는 중국인들에게서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 단일성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는 모든 개인적 현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서는 처음부터 문화민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생성, 형성되었으며, 자기 자신의 문화의식을 가지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미래를 바라보는 민족의 인상이었다.

(두 번째로) 원주민이 주는 인상은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나는 말레이인들이 무역을 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문명에 대한 외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철저히 원시민족으로 계산하고 있다. 중국인들에 대해서는 항상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이는 경쟁과 위험이라는 예감과 혼합된 것이다. 중국 민족이란 경우에 따라 우리의 친구도 또한 적도 될 수 있다. 어떠한 경우든 우리에게 무한한 이익을 주거나 해를 끼칠 수 있는 동등한 경쟁자로서 그들을 연구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개한 원주민들에게서는 이러한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들 역시 곧 나의 사랑을 받게 되었지만, 그것은 보다 어리고 나약한 형제자매에 대한 어른의 사랑이었다.」



「여행에서 얻은 세 번째의 강한 인상은 원시림이다. 인간의 원초적 본향(本鄕)에 관한 최근 이론을 알지는 못하지만, 내게 있어 열대 지방의 원시림은 최소한 상징적으로나마 생명의 고향이며, 태양과 젖은 흙에서 살아 있는 형상들을 부화해낸 소박한 원시적 도가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잊혀졌지만, 태곳적부터 자명하게 태양이 만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초적으로 밤이 깃들며 우주만물을 근원에 이르기까지 변화시키는 것, 생명을 다시 불러오는 아침이 재빨리 불타오르는 것, 생명을 다시 불러오는 아침이 재빨리 불타오르는 것, 비와 폭풍우가 끊임없이 빠르고도 격렬하게 일어나 광란하는 것, 축축이 젖은 비옥한 대지에서 풍기는 따스하고도 약한 짐승 냄새,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신비스럽고 새로운 교훈을 주는 생명의 원천으로의 귀환과도 같았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가장 강한 인상은 인간적인 것이었다. 수백만의 인간들이 지키는 종교적 질서와 결속에 대한 인상. 서양인이 이성과 기술을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동양인은 종교를 호흡하고 있다. 불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아니면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동양인이 갖고 있는 잘 보호되고 가꾸어지고 신뢰로 가득 찬 종교성과 비교해볼 때, 서양인의 영혼 생활이란 유치하고 그때그때의 우연에 내맡겨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인상이 다른 모든 인상을 억누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동양의 강점과 서양의 위험과 약점을 비교해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 영혼의 모든 의혹과 걱정과 희망이 강해지고 확인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도처에서 우리의 문명과 기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도처에서 동양의 종교적인 민족들이 우리에게는 결여된,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가진 우월성보다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재산을 누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동양에서 무엇을 수입한다 해도, 인도나 중국으로 되돌아간다 해도, 어떻게든 형성된 기독교로 다시 도망친다 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 문화가 구원을 받아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처세술과 공동 재산을 다시 발견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종교라는 것이 극복되고 대치될 수 있는 그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겨두도록 하자. 우리에게 종교 혹은 그 대치물이 깊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아시아 민족들 틈에서처럼 준엄할 정도로 분명히 느껴본 적은 없었다.」(1914년)





1920/1921년의 일기장에서 (p.551-558)



「불교도들에게는 열반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열반이 구원이지 혹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인지, 열반이 부정적 혹은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지, 천국의 지복(至福) 혹은 그저 단순한 고요만을 의미하는지, 부처는 이러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거부하고 금지하였다. 나 역시 이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열반이란 개개인이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 되돌아가는 것, 개별적 원칙 뒤편으로 되돌아가는 구원적인 발걸음,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개개인이 만유의 혼, 즉 하느님에게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러한 회귀를 갈망하고 추구하느냐 안 하느냐, 부처의 길을 따라 행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느님이 나를 이 세상으로 보내시어 개별 인간으로 존재하도록 했다면,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쉽게 만유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내 자신 취생몽사(醉生夢死)(≪크라인과 바그너≫에서 나는 이를'자신을 돌보지 않기'라고 이름했다)함으로서, 또한 계속하여 개개의 존재로 분열하여 삶을 즐기려 하는 하느님의 욕구를 그와 함께 참회함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 있어서 부처가 주는 교훈의 순수한 합리성이 오늘날엔 더 이상 완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청춘 시절에 내가 경탄했었던 바로 그 교훈, 즉 합리성과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 소름끼칠 정도의 정확성, 신학과 신과 헌신에 대한 결여가 이제는 내게 부족함이 되고 있다. 종종 나는 예수가(부처가 확실히 믿고 있었던) 환생의 문제와 열반을 끌어들이지 않음으로서 부처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삼키아 학파는 두 개의 원칙, 시작도 끝도 없는 두 개의 사물, 즉 물질과 정신을 부르짖는다. 우리가 쉽게 영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이것은 신경조직이다), 우리 인간 내면에 깃들어 있는 극도로 섬세한 기구가 이 두 가지 원칙을 중재한다. 오로지 물질에 있어서만 변화가 일어나고, 모든 사건은 단지 이 물질에서만 진행되며, 정신 자체는 항상 동일하게 머무른다. 내가 '구분하는 법'을 배움으로서, 즉 모든 사건이 내 정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내가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저 기구를 나의 진아(眞我)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나는 이제 기쁨과 슬픔을 극복하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 내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감각적인 것을 떠남과 동시에 무의식이 나타나고, 내 영혼이 감각적인 것을 떠남과 동시에 무의식이 나타나고, 내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지만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나와 물질의 관계는(그러니까 나와 환생 가능성의 관계는)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되었지만, 진실성에 있어서는 극도로 세련된 이 심리학을 때때로 명상까지 곁들이며 사색하는 일이 나를 요즈음 놀라울 정도로 행복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마음이여, 언젠가 그대는 쉬게 되리라" 라는 시를 한편 썼다.



마음이여, 언젠가 그대는 쉬게 되리라.

언젠가 그대는 마지막 죽음을 주고,

고요 속으로 몰입하여,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을 자게 되리라.

때때로 죽음은 황금색 어둠 속에서 그대에게 손짓하고,

때때로 그대는 죽음이 다가오길 그리워하리라.

그대의 나룻배 망망대해에서 떠다닐 때,

이리저리 폭풍에 쫓기며 머나먼 항구를 그리워하듯이.

그러나 그대의 피, 아직은 붉은 파도를 타며

행위와 꿈을 찾아 흔들거리고, 마음이여,

아직은 그대 삶의 충동과 열기 속에 불타오리라.

저 높이 세상의 나무로부터

열매와 뱀이 그대로 하여금 소망과 열망을,

죄와 쾌락을 추구토록 달콤하게 유혹하리라.

수백 가지의 목소리를 가진 노래들이

감미로운 무지개 놀이를 그대 가슴에 연주해주리라.

사랑의 유희가, 쾌락의 원시림이

환희의 경련 속으로 그대를 초대하니,

여기서는 취한 손님이 되고, 저기서는 짐승과 신이 되어,

목적도 없이 경련하며 흥분하고 무기력해지는도다.

예술이라는 조용한 여자 마술사가 황홀한 마술로

그대를 자기 생활 속으로 이끌어가서는,

죽음과 슬픔에 형형색색의 베일을 그려놓고,

고통을 환희로, 혼돈을 조화로 둔갑시키리라.

정신으로 하여금 최고의 유희를 하도록 유혹하고,

죽음은 그대를 별들과 마주서게 하고는,

그대를 세상의 중심점으로 삼아

합창하는 전 우주를 그대 주위에 정돈시키리라.

짐승과 태곳적 진흙으로부터 그대에 이르기까지

조상들 그대 혈통의 수많은 발자취를 보여주고,

그대를 목표로 그리고 대자연의 종착점으로 만들 것이다.

그 다음에 죽음은 어두운 성문을 열어줄 것이며,

신들을 설명해주고, 정신과 충동을 해석해주고,

어떻게 무한한 것이 계속 새로이 형성되는지를 보여주리라.

그러고는 유희의 거품을 일게 했던 세상을

이제야 비로소 그대가 새로이 사랑토록 할 것이니,

세상과 신과 우주를 꿈꾼 자가 바로 그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음산한 골목길을 따라가노라면,

거기엔 피와 충동이 소름끼치는 일을 일으키고,

또한 그쪽으로 좁다란 오솔길이 열려 있는데,

거기엔 공포에서 도취가, 사람에서 살인이 꽃피어나고,

범죄가 김을 내뿜고 광기가 불타오르는데,

꿈과 현실을 구분해주는 어떤 경계석도 없으리라.

이 많은 모든 길들을 그대는 가게 될 것이고,

이 모든 유희들을 그대는 유희하게 될 것이며,

하나하나의 길 다음에는 더욱더 유혹적인

새로운 길이 뒤따르는 것을 그대는 보게 되리라.

재물과 돈이란 것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재물과 돈을 경멸하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단념한 채 세상을 멀리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격정적으로 세상의 매력을 열망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 위로는 신을 향해, 저 뒤로는 짐승을 향해,

어디에서나 행복의 불꽃이 순간적으로 번쩍이리라.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가보라! 인간이 되고 짐승이 되고 나무가 되라!

세상의 오색찬란한 꿈은 끝이 없고,

문과 문은 그대를 위해 끝없이 열려 있을 것이며,

그 문마다마다에서 충만한 삶의 합창이 울려퍼지고,

그 문마다마다에서 유혹의 손길을 뻗치며, 덧없는

행복이, 덧없이 자비로운 향기가 그대를 부르리라.

두려움이 그대를 사로잡으면, 체념을 그리고 덕망을 수행하라!

가장 높은 탑으로 올라가 그대 자신을 아래로 내던지라!

그러나 알아두라! 어디에서나 그대는 그저 손님일 따름이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손님이면, 무덤 속에서도 손님이라는 것을.

그대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도 전에, 그대는 새로이

탄생의 영원한 물결 속으로 다시 솟아오르게 되리라.



그러나 수천 가지의 길들 중에서 하나의 길을,

예감하기는 쉽겠지만,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니,

그 길은 온 세상의 생활권을 한 걸음에 측량해내고,

더 이상 잘못됨이 없이 궁극적 목표지에 다다르게 하리라.

이 길을 가게 되면 그대는 인식의 꽃을 피우게 되리니,

즉 죽음도 결코 파괴할 수 없는 그대의 가장 내면적 자아(自我)란

오로지 그대만의 것이지,

이름에 귀 기울이는 세상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나긴 그대의 순례는 오류의 길이었고,

이름 모를 잘못에 속박된 오류의 길이었다.

기적의 길이 언제나 그대 가까이에 있었건만,

어찌하여 그대는 그리도 오랫동안 눈이 먼 채 걸어다니고,

그대의 두 눈이 이 길을 한 번도 보지 못할 정도로

어떻게 그런 마술이 그대에게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제 마술의 위력도 끝이 나고,

그대는 각성하게 되어,

방황과 관능의 계곡에서 아득히 울려퍼지는

합창소리를 듣게 되리라.

그리고 그대는 외면으로부터 몸을 돌려,

그대 자신에게로, 내면으로 향하게 되리라.

그러면 그대는 고요히 쉬게 되고,

마지막 죽음을 죽게 되며,

정적 속으로 몰입하여,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자게 되리라.」





힌두교 (p.588-589)



「서양인이 인도를 들여다볼 때, 언제나 가장 심각하게 괴로워하고 불쾌감을 느끼는 문제, 즉 인도인들에게는 신이 초월적일 수도 동시에 내재적일 수도 있다는 문제는 인도 종교 고유의 핵심 내용이다. 종교적 감정은 물론 추상적 사고에 있어서도 이상할 정도로 천재적인 인도인에게는 그런 문제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인에게는, 모든 인간적인 인식과 사고방식이란 그저 하등 세계인 인간 세계에만 해당되며, 우리는 오로지 헌신과 존경, 명상과 기도로써만 신적인 것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약속된 자명한 일이다. 그리하여 3천 년 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인도를 지배하는 힌두교는 아주 터무니없는 대립과 가장 모순적인 표현들,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대립적인 교리와 종교적 의식, 신화와 우상 숭배를 평화로이 자기 내면에 담고 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거친 것과 함께, 가장 영혼적인 것이 가장 감각적인 것과 함께, 가장 자비로운 것이 가장 잔인하고 조야한 것과 함께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다.

영원한 진리는 이런 형상들 속에 깃들어 있지 않으며, 가장 섬세하고 가장 고귀한 형상들 속에 깃들어 있지도 않다. 진리란 그것들을 초월하여 더 높은 곳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브라만은 신의 가르침을 추종하고, 감각적인 사람은 생식(生殖)을 즐겨하는 크리슈나신을 사랑하고, 무지한 자는 쇠똥이 묻은 석상(石像)에 기도를 올려도 좋은 것이다.- 신 앞에서는 모든 존재가 동일하다. 모든 존재란 그저 외관상의 다양성일 뿐이며, 외관상의 대립일 뿐이다.」(1923년)





■역자해설

동양을 향한 헤세의 생애와 정신세계 (p.621)



Ⅲ. 동양인들과의 교제



「매우 주의 깊은 작가는 죽기 1년 전에 톨스토이와 헤세를 많이 읽고 세계관 내지 도덕적인 문제로 몹시 고민하는 젠로 다타하시라는 14살의 조숙한 일본인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하였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지칠 정도로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단념하세요. (……) 당신의 인생과 당신의 천부, 그 의미와 정신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키도록 하는 데 당신 인생의 의의가 있는 것이며, 그 일에 성공을 하면 할수록 당신은 행복해질 것입니다. (……)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며 더욱 풍부하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다양하게 생각하지만, 역시 고독하고 또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임이 있는 대중의 행복은 단념해야만 합니다. 우리 개개인은 자기 자신, 자기와 천부와 가능성과 특성을 명확히 찾아내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완성과 자기 성숙을 하는데 봉사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인류에 봉사하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종교·예술·문학·철학 등)의 가치란 바로 이 도상에서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Ⅴ. 중국정신과 동양의 지혜 (p.631-635)



「1910년에는 ≪도덕경≫에 대한 서평에서 노장철학을 인도 및 서양철학과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져서 때로는 억설을 늘어놓으며 골몰하는 인도철학 이외에 (……) 이 중국의 지혜는 철두철미 실제적이며 소박하게 마음을 이끈다. 자주 변종된 탈선을 하는 서양 사고의 곡예에서는 완전히 부끄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이 태곳적 중국인(노자)은 무정부주의적 전문가 철학을 하는 본능에 내맡겨진 수많은 서양인들보다 기본요소의 가치를 더 잘 인식하고 인류의 발전을 위해 더욱더 위대하고 합목적적으로 작업하였다."

이러한 비판을 입증하고 지지하기 위해 헤세는 《도덕경》의 마지막 장을 그 예로 들었다.



미더운 말은 수식이 없고

수식이 있는 말은 미덥지 못하다.

솔직한 사람은 변명을 하지 않고

변명을 하는 사람은 솔직하지 못하다.

참으로 아는 자는 무엇이나 다 알지 못하고

무엇이나 다 아는 자는 참으로 알지 못한다.

성인은 자신을 위해 덕을 쌓아두지 않는다.

남을 위함으로써

자기도 더욱 덕이 있게 되며,

남에게 덕을 줌으로써

자기도 더욱 덕이 많게 된다.

천도(天道)는 만물을 해치지 않고 이롭게 하며,

성인의 도는 사람과 다투지 않고 작용한다.」



「<선당(禪堂)의 젊은 수도사〉 1부는 폐부를 뚫는 듯한 선사의 호랑이 같은 눈초리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되는 젊은 수도사를 그렸으며, 2부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현혹이며 환상이다.

진리란 언제나 이름할 수 없다지만

나를 쳐다보는 산(山)만은

톱니같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다.

사슴과 까마귀 그리고 빨간 장미

바다의 푸르름과 화려한 세계

정신을 집중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형체도 이름도 없이 허물어질지니.

명상하고 침잠하라.

관조를 알고 독서를 배워라.

명상하라-세상은 가상이 되나니

명상하라-가상은 실체가 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