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오로지 사랑이십니다!!/김ㅇ 식 신부님1

03-07-28 원정 2,489
안녕하십니까?

천주교 ㅇㅇ교구 김o식 신부입니다.



함께 나누고 더 깊이 숙고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 글을 올립니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한 작은 발걸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첨부화일을 여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로지 사랑이십니다!!




시작하면서


사제 서품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그 때에,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신부님! 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고 마음으로 고백하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님의 만찬을 나누고 싶습니다. 해맑은 아이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며 생명을 축복하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사랑 뿐 이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분과 형제들로부터 등을 돌렸기에 고독과 절망 속에서 한숨 짓는이들에게 용서와 평화를 전하고 싶습니다. 둘이 한 몸이 되려는 연인들에게 그분의 축복을 전하고, 이제 당신께 돌아가려는 이들의 마지막 시간에 그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겸손하게 세상의 아픔에 마음 적시며 살고 싶습니다......

삼 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나는 이제 내가 무척이나 하고 싶어하던 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래야만 가슴 떨지도 않고 능숙하게 계속해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세상의 아픔에, 매번 일일이 마음을 적시지 않고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상당히 괜찮은 길로 들어서 있고, 그냥 이렇게 계속 가는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사실 그렇게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마음 한 편에서 떠오르는, 때로는 온통 마음을 뒤덮고 있는, 나의 직무와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의문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은 나를 계속해서 무척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우리 교회는 참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는가? 성직자들은 참으로,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참으로, 믿음의 자유를 체험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참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편견이요, 오해요, 기우일 뿐이길 바라면서도,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참된 자유 안에서 형제적 친교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보다는, 죄의식과 두려움 속에서,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습관적, 강박적으로 얽매어 있는 이들을 더 많이 만난다. 신자들이 늘어나고 그래서 본당을 나누고 성당을 짓는 일이 어디서나 가장 급한 일이 되었지만, 나는 이렇게 팽창하듯 움직이는 우리 교회 안에서, 소리 없이 바닥을 휘도는, 거대한 무기력과 무관심, 교리적, 실천적 의문들과
회의, 권위에 대한 불만에 찬 수군거림과 변화를 요구하는 저항의 몸짓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나에게 답변을 요구하며 육박해 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교회의 현상(現狀)이 본질적으로, 교회 구성원 개인의 선의(善意)와 관계없이, 그 관행적인 가르침과 실천으로부터 구조적이고 제도적으로 연유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교회의 현상(現狀) 속에서, 신부로서의 나의 직무가, 사실상 그러한 구조적, 제도적 불행을 강화시키거나, 최소한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러한 역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지금, 나는 그러한 관행적인 그래서 마치 자연스럽고 마땅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교회의 자기주장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그것이, 참된 사랑과 평화와 자유의 구현이라는 본연의 소명과 관계없이, 정당화될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1) 칠성사(七聖事)는
은총의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통로가 아니다

칠성사는 완결되고 확정된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소급될 수 없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에 의한, 역사적, 신학적 산물(産物)이다. 은총은 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비성사적인 은총의 통로는 여전히 존재한다. 은총은 성사 안에 독점적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사 참여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어떠한 방식으로도, 구원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규정되거나, 의무(義務化)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주일미사와 고해성사에 대한 교회법적, 교리적, 실천적 의무 규정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는 진지하게 재고하여야 한다. 그것이 비록, 개인의 구원을 염려하는 가톨릭 교회의 선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로부터 기인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 결과들은 이미 그 정당성과 현실성을 되묻게 하고 있다. 사실상 많은 이들에게 주일미사와 고해성사는, 은총의 계기로서보다는 부담스러운 멍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 성사들을 통하여, 충만한 구원이 아니라 최소한의 징벌을 바랄 뿐이다. 그들을 그 성사들에로 이끄는 것은 자발적인 원의(原義)와 갈망이라기보다는 두려움 이다.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성사에 다가갈수록 하느님과의 내적인 거리는 오히려 멀어지는 듯한 이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성사 참여의 의무화는, 교회의 선의와는 달리, 이제 성사의 형식화, 비인격화, 성사참여의 기피(忌避)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성사의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성사 참여의 의무화로써, 성사의 중요성과 효력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의무라는 것들에 대해서 점점 더 의미도 매력도 잃어가고 있다.
개인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참여가 권장되고 보장될 때, 성사 은총의 통로로서의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두려움과 부담감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성사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성사의 참된 품위는,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이요 의무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고 충만하게 하는 은총의 통로로서 제안되고 체험되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2)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성사가 아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결되고 확정된 형태로 설립되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복음의 역사적인 구체화이며 신앙의 객관화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가톨릭 교회 사이에는 어떠한 소박한 동질성도 없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표지요 도구인 가톨릭 교회를 언제나 초월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자신의 역사적, 신학적, 인간적 주장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별해야 한다. 이단의 위협과 경험의 왜곡에 따른 교의적 선언의 필요성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시대나 특정한 상황에서만 타당한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일시적인 역사적 양상을 망각하고, 그것을 모든 시대에 통용시키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현에 있어 장애가 된다. 특별히 교계 제도, 교황 수위권, 이혼자들에 대한 교회의 독단적 처분, 독신 남성에게만 한정된 사제직 수여 전통 등을 복음적 명령에로 소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톨릭 교회는 상징적 의미에서라도 하느님께서 정하신 제도에 따라 주교들이 교회의 사목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주교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주교들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업신여기는 것 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 교구 공동체 안에서의 주교의 교회법적이고 현실적인 관할권은 인정되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 권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소박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 가톨릭 교회의 목자로서 로마 교황이 갖는, 교회에 대한 직책상의 완전한 최상전권(最上全權) 이란 그 본질상 비복음적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 할 수 없기 때문이요, 비록 직책상의 것일지라도, 완전한 최상전권 이란 이미 봉사 라는 그 직책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종이 주인의 뜻을 결정할 최종적이고 완전한 권한을 가진다면, 그는 이미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된다.

가톨릭 교회는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차원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시대의 흐름과 징표조차 깨닫고 있지 못함을 통감해야 한다. 이제 어떤 권위와 권한도 위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위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권위와 권한의 정당성과 불가침의 근거로 기능하지 못한다. 이제 모든 권위와 권한은 아래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온다. 사람들로부터 온 것만이 정당하다. 교회가, 마치 자신은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 징표를 거슬러 복음의 가치를 수호하는 양, 교황과 주교의 권위와 권한을 사람들 위로 들어 높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교도권은, 이제 자신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신앙의 순수성 이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가 섬기는 사람들이요, 그들의 마음 깊은 바램이다. 봉사하는 종으로서 교도권은, 그 주인의 바램과 뜻을 알아들어야 한다.
교도권은 불가피한 이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길 원하는 이들의 진실된 바램을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교도권은 그들에게 교회법적이고 원칙적인 답변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최우선적인 사목적 관심과 배려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들이, 완전한 권리가 유보된 제 2급의 신자로 머무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명령인양 방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도권은 사제가 없어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지 못하는, 공동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질 있는 기혼자들에게 사제직을 허용해야 한다. 주님의 만찬을 거행할 공동제의 권리는 그 어떤 교회법 규정보다 선행한다.
교도권은 독신(獨身) 남성(男性)에게 유보된 사제직 수여의 전통을 넘어서야 한다.
어떠한 성서적, 교의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여성에게 사제직을 수여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 이라는 가르침은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



(3)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계시가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복음서의 저자이시다라는 자신의 가르침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교회가 자구적(字句的) 영감설 등과 같은 극단적 주장을 넘어섰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느님으로부터 복음서의 저술가로 선택된 인간의 신적개방성과 더불어, 그의 인간적 한계가 진지하게 고려된다면, 교회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성서 본문의 그르침 없슴에 대해서도 창조적으로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복음서를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복음서의 예수그리스도를 넘어선다. 복음서가 통상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구현하고 있다고 인정될지라도, 그것이 완결되고 최종적인 의미에서 복음의 완성이요, 교회의 자기주장에 있어서의 배타적인 근거로서 제시될 수는 없다. 복음서는 첫 사도들의 본문으로서, 모든 본문의 근간으로서의 권위를 지니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복음서들이 하나의 통일되고 완결된 그리스도론적 교의를 제공하고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소박한 호교론 으로써, 복음서 본문 안에 존재하는 전통과 자료의 다양함, 의도적인 편집 과정, 신학적 입장과 교회적, 시대적 상황의 상이함 등이, 손쉽게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통일되고 완결된 예수 그리스도 교의 는 오히려 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산물이다.

결정적인 것인 것은 본문도, 교의도 아닌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이다. 메시지는 그것을 함축하고 있는 본문에 문자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문자적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근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이것이 메시지에 대한 해석과 적용까지도 문자적으로 완결되었다는 의미일 수 없다.

교회는 매번 새롭게 본문의 태생적 한계로부터 메시지를 건져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산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교의는, 결국 복음서의 본문마저도, 그 자체가, 한 시대의 건져냄 이다. 그리고 건져냄으로서의 교의는, 또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그 시대의 언어와 상황 속으로 건져내는 한에 있어서만 유효하다. 메시지에 대한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교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의와 문자 복음 안에 가두어 두려는유혹에 거듭 저항해야 한다. 복음의 핵심은, 알아듣기 힘듬 이요, 기대하지 않음 이요, 언제나 우리를 넘어서는 놀라움 이기 때문이다.



(4)그리스도는
예수의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술어가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부활 체험을 통하여 사후(事後)적으로 예수와 연관된 본질 규정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의 삶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서, 교회로부터 우선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 예수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로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해소(解消)되어 들어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교회의 철회 불가능한 신앙고백이라는 차원 이상의, 배타적 예수 규정일 수 없다.

신약성서와 사도전승 안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특정한 시대의 역사적, 철학적, 신학적 전(前) 이해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소박한 의미에서의 가치 중립적이고 보편 타당한 예수의 술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결정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바 바로 그것, 곧 인간 예수의 삶이다.

교회는, 인간 예수의 삶 이 지닌 철회할 수 없는 신적 차원을 견지하면서도, 그것이 지닌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를, 자신의 시대를 위하여 새롭게 발견해 내어야 한다. 교회는 전통적인 신앙고백에 만족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것을 문자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신성한 사명인양 착각하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교회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아들을 사수하는 것과, 그것이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언명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있어, 위로부터 주어지는 절대적인 권위와 규정이란 이미 그 뜻을 상실하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가,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초월적인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회의 고백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이 옳은 것이요 그래서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삶 속에서 그러한 고백이 발휘하는 현실성은 너무나 희박하다. 옳은 것이지만 상관없는 것일 뿐이다.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 이라고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아니 이제야 비로소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의 차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이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과 참으로 상관 있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신앙의 진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저 위에 좌정하고 계신 초월자가, 바로 인간 예수이다!
인간 예수의 삶, 역사적 예수가 신학적 언명의 중심 주제로 다루어질 때,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편중된 그리스도 예수 만들기 를 넘어 선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수는 우리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였으며 하느님의 아들로 세말(世末)에 심판하러 다시 오리라는 진술로 자신의 신앙고백을 완결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으로 고백되어지고 있는 예수의 대속적(代贖的) 죽음과 부활은 반쪽의 진리이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고 살아야 할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인간 삶 이다. 예수의 인간 삶 에 대한 합당하고 진지한 성찰 없이, 그의 그리스도됨을 선언하는 것은, 결국 교회의 선의와 관계없이, 그를 무력하고 비주체적인 희생제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요, 복음의 넘치는 생명력을 거세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인간삶을 사실상,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불가피한 전제로 축소시키고 격하시켰슴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히 어떤 초월적인 그리스도 신(神) 에 대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헌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초월적인 신앙 대상은, 동시에 죄 외에는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 예수 이고, 그 사람 예수 의 웃음, 눈물, 두려움과 고뇌, 연민과 분노와 질책, 희망과 이상과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헌신이 배어있지 않은, 그래서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의 것이 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제 교회는 예수의 인간 삶 앞에 정직하게 마주서야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복음 을,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살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사는 바,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도 믿고 살아내는 것이었다. 예수에게 있어, 그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와 같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그가 믿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믿고, 그가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 에 비하면 중요하지도 우선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와 함께 그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은, 전혀 그를 믿지 않는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결정적인 것은 세례도 교회도 아니고, 삶이요 실천이다.

교회는 자신과 예수의 본질적 비동일성, 자신의 행위와 예수의 실천 사이에 놓여 있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을 거의 잊고 말았다. 교회가 총력을 기울여 최우선적인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세례 받은 신자 수를 늘리고 교회 건물을 짓고 본당을 나누고 미사 참례율과 판공성사 참여율과 교무금 납부율과 헌금 총액을 올리는 일은, 예수의 실천과 본질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과 징벌이 아니라, 무조건적인수용과 사랑을 선포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율법적인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선포는, 다름아니라 하느님은 죄인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는 바로 그것 때문에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의 수용과 사랑은 회개의 대가가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회개는 오히려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의 결과이다. 예수는, 문자그대로 누구나 인정하는 죄인들 과 어울렸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세리요, 창녀요, 병자들인 채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기쁨이었고 기쁨은 그들을 변화시켰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의 회개에 선행한다. 회개란 거저 주어지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다.

교회는, 역사를 통하여, 예수의 실천과는 관계없이,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과 징벌을 앞장서 선포하여 왔슴을 고백해야 한다. 교회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을 즐겨 가르쳤고, 하느님께서 용서의 조건으로 엄격한 참회를 요구하시며, 우리가 쌓아올린 공과 죄만큼 갚으실 것이라는 두려운 소식을, 기쁜 소식의 핵심으로 선포해 왔슴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는 종살이가 아니라, 벗과의 사귐을 선포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에게 있어서, 해야 할 것, 의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하고 싶은 것,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참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종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할 것 으로서, 두려워하며 받아들일 뿐이지만, 벗은 벗이 원하는 것을 기뻐하며 함께 원한다.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벗임을 알고 있었고, 이제 사람들을 자신의 벗으로 삼길 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존재이지 행위가 아니다. 행위는 존재의 반영이요 결과일 뿐이다. 행위는 존재를 바꿀 수 없지만, 변화된 존재는 행위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예수는, 잡다한 외적 행위 규범들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불완전하게 행동하는 죄인들을 탓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에 만족하여 안주하는 이들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예수에게 있어, 결정적인 것은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의 존재는 모든 율법을 충족시키고 모든 행위를 완성시킨다.

교회가 선포해온, 명(命)하시는 하느님과 지켜야할 계명과 심판과 징벌의 두려운 소식은, 예수의 마음 깊은 열망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을 종살이에 머물게 하고 말았다. 교회는 끊임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불완전한 자신의 행위에 얽매이게 만들었을 뿐, 존재의 참다운 변화에로 인도하는 데에는 대부분 형편없이 실패하였다. 죄의식은,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자연스럽고 마땅한 마음자세가 되었으며, 고해성사는 역설적이게도 죄의식을 강화시키는 은총의 통로로 자리 잡았다.

예수는, 죽음 후의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 을 선포하고 그것을 살았다. 예수는, 의로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죽음 후에 들어가는 하늘의 나라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는, 죽음 후의 그 나라를 기다리며, 지나가는 이 세상을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하지 않았다. 예수는, 온전히 이 세상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를 던졌으며,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형제인 타인들 과 이루는 새로운 삶을 경축하였고 그 삶에로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것이요, 새롭게 사는 것이요,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교회는, 수많은 축복예식들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이 세상과 삶 을 축복하지 않았음을 고백해야 한다. 교회에게, 이 세상은 죽음 후의 천국을 얻기 위한 시험장이요, 삶이란, 죄악에로 이끄는 수많은 유혹들 그리고 불신앙에로 이끄는 끝없는 시련들과 맞서야 하는 싸움이다 라는 믿음이야말로 오히려 자연스럽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할 때보다, 단식하고 금욕하고 엄숙히 참회할 때가 더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것임을 소리없이 배워야 했다. 교회는, 이웃과 함께 삶을 경축하기보다는, 조용히 각자의 구원에 힘써야 할 곳이 되었다.

교회의 현상(現狀) 속에서, 예수는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느님의 인간 되심은, 결국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 의 전제일 뿐이다. 이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교회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동어반복으로까지 공허해졌다. 하지만, 예수는 살아있는 인격이요, 그리스도가 이름이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것은, 살아있는 예수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오로지 초월적인 그리스도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예수인 한에서.



(5)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자기 계시가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종교다원주의는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하고도 영구적인 현실 이다. 온 세상을 두루 아우르겠다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이다. 어느 곳에도 세계의 중심은 없다. 아니면 모든 곳이, 모든 민족이, 모든 문화가, 모든 종교가 처음부터 저마다 세계의 중심이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종교들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막연하게나마 영상을 통해서 찾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와 같은 실로 오만한 진술을 정당화 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는 이제 더 이상, 유일한 종교도 으뜸 종교도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하나이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언명일 뿐이다. 불교인,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유대교인 그리고 수많은 종교를 신봉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뿐,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없다.

막연하게나마 영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 다른 종교들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닌 모든 선함과 참됨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물론이려니와, 이 세계 안에서,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의미 있고 책임 있는 존재로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종교들은 모두, 자신을 하느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로 천명한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소박한 유아론(唯我論)일 수밖에 없슴을 교회는 인정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셨다면, 하느님께서는 고타마 붓다 안에서도, 크리슈나안에서도, 마호메트 안에서도, 자라투스트라 안에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교회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자기 주장을 통해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인들에게 끼친 역사적 과오에 대해 참회하고, 이제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자신과 완전히 동등한 그분의 자녀들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갖 역사적 기득권과 특권 그리고 유아적(唯我的) 환상의 포기는, 그리스도교에게 새로운 선교적 상황을 부여한다. 이제 결정적인 것은, 참된 가르침이 아니라 참된 실천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으로 구현하는 종교에 마음을 열 것이다.



(6)인격적인 하느님은
신(神)의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술어가 아니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언어가 지니는 한계와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형언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을 가르친다.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라는 것이요,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모든 신학적, 종교적 언표(言表)는, 본질적으로 상징적이고 잠정적인 차원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러한 자신의 근본적이고 최우선적인 통찰을, 하느님의 인격성에 만큼은 철저하게 유보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인격성 이란, 상징적이고 잠정적인 언표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 그 자체라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이러한 주장이 지니고 있는, 심각한 논리적 모순을 인정해야 한다.

인격적 하느님은, 존재의 심층, 존재의 근거, 존재-자체로서의 초월적 신(神)에 대한 개방적 표상(表象)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신은 인격적 으로 표상될 수도 있고, 자유(自由)로이 자신을 인격적 으로 계시할 수도 있지만, 인격성안에 제한될 수는 없다. 인격적 하느님 을, 신의 유일하고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술어로 단정짓는 것은, 결국 신을 소유하고 임의로 규정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그 때부터 그 신은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인격적 하느님에 대한 성서적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들은, 새삼 재차, 스스로가 믿는 하느님의 본질적 초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인격, 당신, 살아 계신 분 등으로 언표(言表)되는 하느님, 신(神)은 동시에 비(非)-인격 , 비(非)-당신, 비(非)-생존자이며, 도(道)이고 범(梵)이며 공(空)이다.

인격적이고 동시에 비-인격적인 하느님, 신(神) 이해라는 전제아래서, 유신론과 범신론의 양립 불가능한 대치라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유신론과 범신론은,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두 극이 아니라 서로 보완되어야 할 신 이해의 두 길이다. 이것은, 단지 소박한 혼합주의적 해결책이 아니라, 하느님의 절대적 초월성과 자유(自由)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다. 하느님에게는 어떤 제한도 없다. 신(神)에게는 어떤 방식도, 어떤 길도 모두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범신론 을, 마치 혐오스러운 사설(邪說)이요, 그리스도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이단(異端)으로서 단죄하는 교회의 태도는, 비이성적이요 강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인격이나 비-인격, 유신론이나 범신론이 아니라, 사랑 이다.
신(神)에 대한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술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 뿐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하느님이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의 유신론적, 호교론적 논의와 실천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인격적이지만, 감시하는 하느님, 질투하는 하느님, 분노하는 하느님, 심판하는 하느님, 징벌하는 하느님, 지옥에 떨어뜨리는 하느님, 두렵고 무서운 하느
님 이었다.

성직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신자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데 있어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두려움과 위협을 이용하였슴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신자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인격적인 하느님의, 감시와 질투와 분노와 심판과 징벌과 지옥불을 진지하게 사용하였슴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인격적 하느님을 고수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그 본래적인 선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유일한 하느님상(像), 곧 사랑이신 하느님을 심각한 정도로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역할을 하였슴을 인정해야 한다.

본의가 아니었다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모두 다 그렇게 믿는 것은 아니라고 덮어둘 일이 아니다. 순진하고 무지한 평범한 신도들의 왜곡된 믿음일 뿐, 교도권의 참된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고 회피할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고 말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게 아니면, 신앙생활에는 두려움이 필요한 것이라고, 어는 정도의 두려움은 유익한 것이라고, 두려워하지않는 것은, 교만과 방자함과 불신앙의 증거라고 손쉽게 강변하거나 을러댈 일이 아니다.

이제 교회는 절대로, 하느님이 내려다보시고, 마음 상해하시고, 화내시고, 판가름하시고, 벌을 내리시고, 지옥에 보내신다 고, 비유(比喩)로라도 말해서는 안 된다. 이미 그런 비유의 위험성은 재고의 여지도 없이 명백히 드러났다. 비유는 비유로 머물지 않고 실재(實在)가 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오해가 가져오는, 신앙의 왜곡과 변질과 불행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는 이제 그 모든 비유들을 폐기하고, 있는 그대로, 큰소리로,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하느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느님은 오로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절대로 감시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절대로, 늘 우리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기 위하여,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감시자가 아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보신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랑의 눈길일 뿐이다.

하느님은 절대로 분노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 때문에 마음상해하시거나, 질투하시거나, 화를 내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을 위하여 무언가를 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무한한 지복(至福) 안에 머무시며,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으시고,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다. 우리가 그 분을 위해서 해야만 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그 분은 넘치는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절대로 심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옳은 것과 그릇된 것,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선(善)한 것과 악(惡)한 것으로 판가름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그릇된 것의 반대편, 금지된 것의 반대편, 악(惡)의 반대편에 계시는, 한 쪽 편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악(惡)은 하느님과 맞서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은
옳은 것과 그릇된 것,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선(善)과 악(惡)의 너머에, 그 위에, 그 모두 안에 계신다.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하느님밖에 있을 수 없다. 판가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절대로 징벌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도 보복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유의 행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벌(罰)이란 없다. 어떠한 고통도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의 행사를 통하여 갖게 되는, 어떠한 부정적 체험도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는다. 자유 행사의 부정적 결과는 자연 (自然)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유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느님이, 누군가를 영원히 고통으로써 벌 하는 곳-공간적 장소이던 영적 상태이던-으로서의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의 고통을 바라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결코 감시도, 분노도, 심판도 징벌도 하시지 않지만, 당신의 지복(至福) 안에 머물며 우리를 혼자 버려 두는, 자기만의 사랑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매순간 우리를 당신에게 부르시며, 당신과 함께 머물게 하시고, 당신과 하나되게 하신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이유로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오시는 그 분을 막을 수 없다. 우리의 죄는 그 분을 막지 못한다. 우리의 악은 그 분을 막지 못한다. 우리는 절대로 영원히 하느님을 놓칠 수 없다. 그 분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크고, 그 분의 사랑은 우리의 악보다 크다.



마치면서

나는 지금의 가톨릭 교회가 변화되고 쇄신되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계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교회의 현상(現狀)을 그 자체로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 가톨릭 교회 안과 밖의 수많은 사람들은, 변화되고 쇄신된 교회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교회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가톨릭 교회의 관행적 가르침과 실천 자체가 문제라거나, 그것이 단순히, 폐기되어야 할 지난 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있고 기꺼이 그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문제는, 그러한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이 운용되는 방식 곧, 그것만이 유일하고 배타적이며 독점적인 것처럼 사람들을 압박하는, 부당한 절대화에 있다.

이제 인류의 정신은 성년(成年)의 턱을 넘어 가고 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과거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진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은 더 이상, 절대적인 것으로서 소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거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체험에 와 닿는가? 의 여부이다.

결국, 어떠한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도, 사랑이신 하느님 , 하느님의 사랑앞에서는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드러내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한에서만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 서기 힘든 미성년(未成年)의 인류에게 교회의 세세한 관여와 지도와 다스림은 나름대로의 의의를 충분히 갖는 것이었고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에 있어 유효하다. 하지만, 성년에 도달하고 있는 인류를 위한 교회의 역할은,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이제 교회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 스스로의 판단과 행동에 따라 하느님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신뢰할 만하고 마음 편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 위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위에 자신의 두 다리로 굳건히 서있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과 실천을, 유일하고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방식으로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은, 그 본래적 선의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람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교회는 스스로 모든 것을 파악하고 다스리고 이루어내야 한다는 강박적 사명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대한 믿음. 사랑을 믿음.

이제 교회는 선택해야 한다. 다시 한번, 이 천년 전의 그 때처럼,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스스로를 개방하고 그 세계를 끌어안을 것인가? 아니면 폐쇄적인 유아적(唯我的) 집단으로 남을 것인가? 믿고 놓을 것인가? 아니면 움켜쥘 것인가?

나는 꿈이 있다.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꿈.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꿈.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꿈.
주일 아침
성당과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반으로 줄어도
그 곳에 모인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끌려오듯 왔다가 도망치듯 빠져나가지 않는 꿈.
그 곳에 모인 사람이면 어느 누구나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괜찮고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그래서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희망차고 사랑스러운지 잘 알고 있는
그런 꿈같은 꿈.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나만의 꿈이 아님을.
모든 사람이 그 꿈을 꾸면
꿈은 꿈이 아니다




작성자: 김o식 신부님
작성일: 2000년06월07일 14:47
출처: http://www.netian.com/ 자유게시판

혹여, 신부님께 누가 될까봐 신부님의 교구와 세레명은 지웠습니다.




  • 03-08-01 載仁
    "성당과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반으로 줄어도 그 곳에 모인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끌려오듯 왔다가 도망치듯 빠져나가지 않는 꿈"

    지금쯤 신부님의 본당은 꿈이 아니라 현실일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