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은 없다, 질병과 대결하지 말고 사귀라.”0

03-07-28 원정 776
출처: 문화일보
작성자: 조용현 교수



“질병은 없다, 질병과 대결하지 말고 사귀라.”

인간의 몸과 질병을 진화론적으로 연구한 철학자 조용현(인제대 인문문화학부) 교수는 질병에 대한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끈다. 그는 신간 ‘상생의 철학’(동녘)에 실린 논문 ‘대결의 의학에서 사귐의 의학으로’에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 병원성 세균도 자연의 이상현상(異常現象)이 아니고 자연의 엄연한 일부”라며 “그것은 다스림의 대상일 뿐 근절의 대상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조교수는 “인간의 몸은 60조개의 세포로 구성돼 있으며 그것의 10배에 해당하는 박테리아 등이 서식하는 거대한 생태계”라면서 “현대의학은 우리 몸이 진화의 산물임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양의학에서는 병을 자기(自己) 속에 비자기(非自己)가 침투한 것으로 보고 항생제를 이용해 비자기를 몰아냄으로써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지만, 농약의 남용이 저항성이 더 강한 잡초를 진화시켜 온 것처럼 항생제는 우리 몸의 생태계를 붕괴시키면서 독성의 병원균을 진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질병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이 우주에 순수한 ‘나’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철학적 사유에서 비롯됐다. 또한 “진화론적으로 볼 때도 질병은 실체가 아니라 다자(多者)가 관계를 맺는 역동적 과정을 일컫는 말”이라고 했다. 장내에 기생하는 대장균도 과거 어느 때인가 인간의 몸에 침입해 치명적 질병을 일으켰겠지만 오랜 세월의 합종과 연횡을 통해 그 독성을 순화시키고 우리 몸 생태계의 일부가 된 것처럼 질병은 내가 다른 것과 관계를 맺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조교수는 “독성이 강한 약으로 균을 전멸시키려는 시도는 또 다른 강한 내성을 가진 균을 진화시킬 뿐이며, 과잉진압의 결과 우리의 면역계가 스스로를 공격하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다”며 “몇년전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렸던 것이나 최근 국내에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확산된 것도 질병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현대의학의 맹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대결을 통해 균 자체를 괴멸시키기보다는 전파경로를 어렵게 하거나 차단시킴으로써 독성을 순화시키는 방법이 장기적으로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정희정 기자 nivose@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