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소식

북한에 겸허하게 다가가기/박노자0

03-09-14 원정 1,320
약 10여년 전 필자는 러시아에서 1980년대 운동권에 몸담았던 한 한국 박사 과정 유학생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학생은 필자에게 국립 도서관에서 북한 관련 저서를 찾는 법을 물었고 필자는 북한 도서들이 많은 아시아·아프리카부(部)의 주소를 가르쳐주고 유명한 월북 작가인 민촌 이기영(民村 李箕永)의 1940-50년대 소설 <땅>과 <두만강>도 읽어보라고 권했다. 월북 뒤 이기영의 체제 순응적인 행각에 대해서 필자는 아쉽게 여겼지만 그의 소설의 독특한 토박이 언어와 옛날 조선 농촌의 일상과 농민들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를 좋아했다. 그 작품이 그 박사 과정생에게 ‘또 하나의 코리아’의 발견이 되리라 확신했던 필자는 후에 다시 만나 독후감을 물어보았는데 그의 대답은 의외이었다. “기법이 낙후하고 19세기 풍의 리얼리즘 수준을 못 벗어나고, 서구의 영향을 계속 받아온 남한 소설은 이미 다른 차원을 이루었기에 한국 사람에게는 이기영 류의 작품은 문학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기영의 작품이 요즘 남한 소설의 이미지 세계와 다르고 그래서 남한 독자들에게 호소력이 약할 수도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진짜 이유는 말이 아니라 그 어조와 눈빛이었다. 서구의 ‘선진적’ 수준에 도달한 우월적인 입장에서 ‘후진적’ 북한의 문예에 아무런 가치도 부여 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었다. 북한의 문예라면 무조건 ‘전체주의적 선전 아트’로 송두리째 취급하는 서구·미국의 우파적 ‘주류’처럼 말이다.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반공주의가 뒤섞인 서구·미국인 ‘주류’들의 극히 편협된 북한관은 고쳐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 침략의 경우에 북한과 함께 폐허가 될 남한의 주민들마저도 침략주의자들의 자기 우월주의적 세계관을 마냥 따라가서, 세계 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죄() 밖에 없는 형제들을 촌스럽게 여기고 무시하면 정말 큰일이다. 1980년대의 지적인 세례를 받은 사람마저 ‘풍요의 1990년대’에 들어 그 풍요를 나누지 못한 북녘 동포 문학의 묘미를 이 정도 모른다면 더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나 북한을 ‘재앙 지역’으로만 아는 1990년대 세대의 북한 인식은 어떨까 북한에는 독특하며 배울 점이 많은 학술·문학·음악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이 인식할 수 있을까

동포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1990년대에 수백만 명을 기아·아사 지경으로 몰아간 북한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보수·극우 언론들이 유포하는 ‘체제의 광신도’로서의 북한인의 상(像)은 현실과 다르다. 1970년대의 남한인들이 모두 박정희의 충노(忠奴)는 아니었듯 오늘날의 북한인들 중에서도 고민·비판할 줄 아는 역동적인 사람들이 있다. 체제를 부정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관료주의와 같은 가시적인 사회악에 대한 비판은 북한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허용돼 있다. 예컨대 북한의 현대 소설가 김문창의 <열망>이라는 최근의 장편(1999년)에서는, 민중들이 굶는 가운데 호화주택에서 살면서 호화판 식사를 즐기는 파렴치한 북한 고급 관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북한 사회 안의 비판적인 지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북한 사회에 대한 우리의 ‘후진적인 그들’과 ‘선진적인 우리’라는 단순한 오만은 한국사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북한의 학설에 힘입었던 1970-80년대의 과거에 대한 배신이며 앞으로 올 미래에 대한 반역임에 틀림없다. 북한에 대한 서구·미국적인 선입견들이 남한에 그대로 이식되는 것은 탈북 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심화시켜 통일의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분단의 폭력 시대를 넘으려면 북한 주민에 대한 존중과 애정, 그리고 사회 내부의 역동성에 초점을 맞춘 겸허한 ‘내재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교수·한국학

출처 : 한겨레신문
편집 : 2003.09.14(일) 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