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지원국 해제... 벼랑끝전술 또 통했나
오마이뉴스 | 기사입력 2008.10.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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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욱식 기자]
미국이 이르면 내일(11일)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공식 해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내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6자회담이 되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 임기 내에 6자회담의 '2단계+알파'가 완료되고, 3단계 협상의 디딤돌을 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대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알파'란 10.3 합의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미국이 강력히 요구한 검증 방안에 부분적인 합의가 추가로 이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 부시 행정부는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방북시 협의한 검증 방안을 수용하고 북한을 테러지원국 목록에서 삭제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8월 중순부터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를 중단한 북한은 9월 들어 핵재처리시설의 재가동에 들어갔고, 10월 9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이 영변의 모든 핵시설에 접근하는 것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했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거의 유일한 외교적 업적마저 물거품이 처할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최근 한국과 일본에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방침을 통보하고, 6자회담 재개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분리 검증', 그러나 난제는 많다

 
▲ 평양 방문 전날인 9월 30일 크리스토퍼 힐 미국무부 차관보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심의 초점은 힐의 방북시 북측과 협의한 검증 방안에 모아지고 있다. 일단 두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하나는 힐의 방북시 협의한 검증안을 부시 대통령이 동의하면 북한은 이를 중국에 제출하고 이와 동시에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북한은 미국의 검증의정서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협의하에 중국에 제출하는 셈이기 때문에 체면을 살릴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분리 검증'이다. 미국은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전달한 검증의정서 초안에서 플루토늄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우라늄 농축, 핵무기, 핵무기 제조 및 실험, 핵확산 활동 등 모든 핵활동을 검증하는 방안을 제출했다가 북한의 강력한 반발을 야기한 바 있다. 북한이 지난 6월에 제출한 핵 신고서는 영변 핵시설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국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분리 검증'은 일단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 내용의 검증을 우선 진행하고, 핵무기, 핵무기 제조 및 실험, 우라늄 농축, 핵확산 활동에 대해서는 추후에 검증하는 방안을 의미한다. 북한과 미국이 이러한 단계적이고 분리된 검증안에 합의했다면 큰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검증 문제가 말끔히 해소된 것은 결코 아니다. 검증을 영변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한정했다고 하더라도, 사찰 대상과 방법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찰 대상을 신고 시설에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미신고 시설까지 확대할 것인지가 최대 쟁점이다. 또한 사찰 방법과 관련해서 문서 검토, 시설 방문, 기술 인력 인터뷰 등 지난 7월 6자회담 수석대표 합의에 국한할 것인지, 미국이 강력히 요구해온 시료 채취까지 포함할 것인지도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는 검증 협의 내용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위층만 알고 있고, 또한 철저한 함구령이 떨어져 있어 그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전하고 있다.

경수로와 특별사찰 맞교환?
예상할 수 있는 절충안은 이렇다.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은 제네바 합의 및 9.19 공동성명을 종합해, 경수로 제공 논의 시점에 특별사찰도 함께 논의한다는 것으로 합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하면, 북한은 경수로를 제공받기 위해서는 특별사찰을 받아야 하고, 미국은 특별사찰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경수로 사업 재개에 합의해야 한다는 '상호주의'가 적용될 수 있다.

'지문채취'에 해당하는 시료채취와 관련해서는 신고 시설에 국한해 합의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일단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신고한 5MWe 원자로와 핵재처리 시설에서 시료채취를 하면 2003년 이후 북한이 추출한 플루토늄 분량을 거의 정확히 계측할 수 있다. 북한 역시 2003년 이후에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신고했기 때문에, 신고 시설에 대한 시료채취는 수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플루토늄 검증의 관건은 1990년을 전후해 북한이 어느 정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느냐에 모아진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90g 정도라고 신고한 바 있고, 미국은 10kg 정도 된다며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까지 몰아넣은 1차 핵위기의 핵심이자, 오늘날 검증 방안 합의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이 합의되더라도 비핵화와 평화 프로세스를 언제든지 뒤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협상파의 언론플레이와 과유불급의 교훈
아직 단언할 수는 없지만, 부시 행정부는 '스파이 허가장'을 거둬들이고 현실적인 검증안 수용 및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국이 조만간 테러지원국 해제를 발표한다면, 결국 미국은 또 다시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밀린 셈이 된다. 그런데 이는 부시 행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 내 협상파의 '언론 플레이'가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 협상파는 부시 행정부의 과도한 검증 요구로 6자회담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내부 문서를 워싱턴포스트에 전달했고, 워싱턴포스트는 이 문서를 인터넷을 통해 공개했다.

'검증방안 검토 문서'가 공개되자 미국 내 전문가와 언론은 '부시 행정부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워싱턴포스트는 "합의 문서에도 없는 새로운 요구를 제시했다"고 비판했고, 이라크 사찰단원을 지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스파이 허가장"이라며 풍자했다. 뉴욕타임즈 역시 "패전국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라고 비판했고, 미국외교협회(CFR)의 개리 사모어 부회장은 "백지 수표"라고 불렀다. 당사자인 북한은 '가택수색'을 하겠다는 것이냐며 정치적 비난에서 멈추지 않고, 불능화 중단→원상복구→IAEA 감시단 접근차단 등 위협적인 행동으로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비난 여론과 북한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는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북한과의 협상시 중대한 교훈을 준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협상을 하되 일단 합의하면 합의에 충실하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부시 행정부가 새로운 요구 조건을 내걸지 않고 8월 11일에 테러지원국 해제를 단행했다면, 지금쯤은 검증 문제를 포함한 3단계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거나 합의에 도달했을 을 것이다. ;지나치면 다다르지 못한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사자성어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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