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연관성’단호히 반박
북한은 핵 개발 포기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까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CVID) 방식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하라는 조지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그동안 부시 대통령이 강조해 온 ‘정권 교체’ 전술을 포기한다면 북한도 일정한 양보와 함께 핵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포기할 의사가 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의 2시간여에 걸친 면담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밥 우드워드의 새 책 <공격계획>을 다룬 <시엔엔방송> 프로그램을 봤다며, 이렇게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문제로 아주 바쁜 것 같더라. 부시 행정부가 공정한 방식으로 핵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대로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CVID)으로 먼저 핵 프로그램을 폐기할 수 없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문제와 차기 대통령 선거 때문에 핵 문제 해결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게 시간은 많지 않다. 우리는 핵 문제 해결이 지연되는 시간을 100% 활용해 양적인 면은 물론 질 적인 면에서도 핵 억지력을 효과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핵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폐기하기 위해 양쪽에서 동시적인 조처를 취하자는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뭔가?”
북한이 제안한 핵 폐기를 위한 동시조처에 대해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1단계로 플로토늄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것과, 다국적 에너지 지원 및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를 맞바꾸자는 게 북한의 제안이다. 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해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등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것도 요구했다. 김 부상은 “만약 미국이 우리의 친구가 된다면 플루토늄 프로그램 동결은 핵 개발의 완전한 폐기로 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다국적 에너지 지원과 관련해 남한 전력공급망과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4월20일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북한을 핵무기와 미사일 확산국으로 몰아세우며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에 핵 물질을 팔 가능성을 경고했던 이른바 ‘상하이 발언’을 언급하자 북한 인사들은 날카롭고 단호하게 반박했다. 김영남 위원장은 “우리는 핵 물질과 미사일에 대해 분명히 다르게 접근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외화벌이를 위해 미사일을 팔 자격이 있다. 하지만 핵 물질과 관련한 우리의 정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확고하다. 알 카에다는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이를 이전시키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다는 게 우리의 정책이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 선제공격’위협 해소를
백남순 외무상도 같은 얘기를 했다. “분명히 해두겠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하며, 우리가 보유한 핵 물질을 다른 쪽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핵 개발 프로그램은 순전히 자기 방어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9·11 동시테러 직후 알 카에다가 벌인 야만적 공격으로 엄청난 비극과 충격을 미국인에 끼친 것에 대해 비난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오히려 이를 이용해 미국인들이 우리에 맞서게 했다. 우리는 진심으로 미국인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며, 그들의 우정을 필요로 하고 있다.”‘혼합형 경제’전화은 대세
3년 전 방북 때와 이번에 가서 본 북한의 가장 큰 변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강경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2002년 중반 시작한 경제 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흥분이었다. 느린 속도지만 북한은 분명히 시장경제적 성과급 제도와 높아가는 소비자 기대수준으로 혼합경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으며, 향후 10년 안에 이웃한 남한과 중국의 경제형태와 상당히 비슷한 모양새를 띨 것이라는 게 현지 주재 외교관들과 외국 인도지원 활동가들의 전언이다.
북한 경제의 변화를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것은 지난해 가을 문을 연 평양 시내 한복판에 있는 통일로 시장이다. 약 2200개의 점포가 들어선 이곳에선 농산물에서 텔레비전까지 갖가지 상품을 팔기 위한 치열한 자본주의적 경쟁이 벌이지고 있다. 평양시내 전역에서 현재 이런 시장 건물 20개가 건설되고 있으며, 여타 지역에서도 비슷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거래되는 식료품 가운데는 할당량을 채운 뒤 남는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다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농촌지역 협동농장에서 가져온 것도 있고, 일부는 개인이 할당받은 경작지에서 재배한 것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식료품과 일부 소비재는 공식 허가를 받은 북한이나 중국 출신 중개상을 통해 인근 만주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다.
소규모 점포 창업도 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변화는 국영기업의 손실을 메꾸기 위한 정부 보조금이 끊겼다는 점이다. 국영기업 스스로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의 판로를 개척하거나, 국영기업간 생산품 맞교환 등이 장려되고 있다. 이익금은 고스란히 재투자된다. 이를 두고 한 외교관은 “사유재산제로 가는 중간 단계”라고 분석하며, 중앙정부의 권력 분산화 정책을 통해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기업가 계층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농산물 가격 상승을 통한 농민층 수입 증가와 정권의 기반인 광부, 산업노동자층, 군인 월급의 대폭 인상을 가져온 물가 및 임금 개혁이 끼칠 경제적 파급에 대한 판단은 아직 이르다. 정치적으로 볼 때 개혁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농촌지역의 지지기반은 분명 안정화했다. 하지만 물가인상을 따라갈 만큼 충분히 급여가 오르지 않은 도시지역 사무직 노동자들 사이에선 불만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는 공무원 집단도 포함되는데, 이것이 부패문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전력공급망과 상수도, 도로시설 등 사회간접시설 재건을 위한 대규모 국제원조가 없이는 북한의 경제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개혁정책의 경제적 잠재력도 현실화하지 못할 것이며, 이에 따른 사회·정치적 영향은 불안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해외 원조와 무역 및 투자를 위해서라도 핵 문제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군부 강경파를 설득하기 위해선,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경제지원과 함께 지난 2년여 동안 핵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게 된 원인이 됐던 미국의 선제공격론이 주는 위기감도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처럼 닫힌 사회가 실제로 비핵화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미국과 그 동맹국이 확신하게 될 수 있을까? 방북 기간동안 북한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어떤 미국 대통령도 북한이 핵 협상 과정에서 요구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안전보장을 해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국방부는 북한이 남한이나 일본·미국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질 경우, 특히 북한이 합의를 어기고 핵 무기를 보유했을 경우엔 보복공격에 나설 수 있는 선택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만난 인사 가운데 한명은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부시 행정부보다 적대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안전보장 요구를 재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미 관계 정상화에 따라 미국 외교관과 기업인들이 평양에 상주하게 되면, 종이쪽지에 불과한 안전보장 약속 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선제공격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북핵 문제를 협상으로 풀 수 있는 기회의 창은 언제까지 열려 있을까? 북한이 만약 또 한차례 장거리미사일 발사실험을 하거나, 나아가 핵 실험을 하기라도 한다면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행동에 나서기 전까지 북한이 어느 정도나 시간적 여유를 두고 있느냐는 질문에 김영남 위원장은 “협상에 마감시한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참을성이 많다. 하지만 미국이 현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 적절한 때가 되면 실험 재개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리찬복 장군은 “실험없이 개발이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면, 그 때 실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곧바로 “하지만 실험이 없이도, 우리는 핵 무기 개발을 완료해 양산해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